인쇄 매체의 부활… “‘MAGMA’는 긴 안목을 제공, 진정한 예술적 감성만이 존재해”
입력 2023.11.17 10:01

마그마 MAGMA supported by Bottega Veneta 폴 올리벤느 단독 인터뷰


인쇄 매체의 시대가 끝났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 남자, 몰락이 아닌 부활을 말한다. 글로벌 독립출판물 마그마(MAGMA)의 창립자이자 편집장인 폴 올리벤느(Paul Olivennes).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사상가이자 작가인 조르주 바타유의 잡지 도퀴망(Documents·1929), 초현실주의적 잡지인 미노타우로스(Minotaure·1933), 현대 미술가 앤디 워홀의 인터뷰(Interview) 매거진 창간호(1969)와 같은 위대한 20세기 예술적 전통을 되살리겠다며 지난 7월 ‘마그마’란 이름의 출판물을 선보였다.
224페이지 분량으로 겉으로는 책의 형태지만 올리벤느 편집장은 “예술적 표현을 위한 포럼이자 미학적 선언문이며, 예술가와 작가가 협업하고 공동 창작을 할 수 있는 실험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예술가와 예술가, 또는 독자를 잇는 매개체로 인쇄물을 택한 것이다. 어찌보면 무모한 시도에 가까운 도전을 택한 올리벤느 편집장은 인쇄 산업에 잔뼈가 굵은 것도 아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로 복귀한1997년생으로, 흔히 말하는 ‘디지털 네이티브(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여 성장한 세대)’다.
하지만 그의 DNA는 인쇄물의 가치를 일깨우게 했다. 올리벤느의 외할아버지 피에르 베레스(1913~2008)는 ‘프랑스 서점의 왕’으로 불리며 각종 희귀본·초판본을 수집하고 기부하며 명성을 쌓았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그의 부고를 전하며 “끈질긴 도서 수집가(Tenacious Book Collector)”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어머니 안젤리크는 로펌 대표 변호사, 올리벤느의 아버지는 데니스 올리벤느는 현재 프랑스 좌파 성향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대표를 맡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각종 예술서적 수집광이었다는 그는 인쇄물을 통해 인쇄 매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험을 한다. 예술 분야, 국가, 세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간호를 통해 18명의 예술가의 80여 개의 예술·문학 작품을 소개했다. 각 번호를 매긴 2000권 한정판. 이전에 발표된 적 없는 미공개작이 대부분으로 마그마를 위해 새롭게 작업한 작품도 있다. 브라질 현대 화가 루카스 아루다의 그림은 프랑스 철학가 에두아르 글리상의 시와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 유명 사진가 프랑수아 알라르가 찍은 시칠리아의 바로크 형식 궁전인 빌라 팔라고니아의 사진과, 같은 장소에 대해 1787년 괴테가 쓴 글이 함께 실려 있다. 또 프랑스 유명 사진가 소피 칼의 ‘왜냐하면(Parce que)’ 시리즈가 이어지는 한편, 1979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예술가 안드라 우르수타의 애도와 사랑에 대한 노래를 엑스레이 사진 위에 담았다. 그녀의 흉부가 엑스레이에 담겼지만 책마다 조금씩 달라서 마치 책 한권이 각각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프랑스 유명 시인 르네 샤르가 자신의 대녀가 글쓰기에 관해 묻자 답으로 쓴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편지가 이번 호에 소개되며, 편지의 팩스 본도 함께 실렸다. 독립출판물이지만 출간에는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후원이 있었다.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레이지가 지향하는 지적 예술을 향한 폭넓은 비전이 바탕이 됐다.
글로벌 독립출판물 마그마(MAGMA)의 창립자이자 편집장인 폴 올리벤느(Paul Olivennes)./보테가베네타 제공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 예술계를 아우른 그는 “한국 예술계는 풍부하고 흥미롭다. 윤형근이나 이우환을 비롯한 많은 한국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특히 좋아하고, 홍상수·박찬욱·봉준호 같은 영화 감독 역시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올리벤느는 “기술적 복제(technological reproducibility), 인스타그램, 가상성(virtuality), 일시성(ephemerality)의 시대에 유형적이면서 영원성을 지닌 객체로 맞서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전 세계 주요 미디어와 예술계가 그를 향해 박수를 보낸 건, 이러한 작업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재 디지털 세대의 ‘시대 정신’을 해독하는 또다른 열쇠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그마를 발간하게 된 계기는?
“저는 오랫동안 20세기 예술 저널과 아방가르드 출판물, 문학 및 예술 출판물을 보고, 읽고, 수집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 세대에는 그러한 출판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동시에 오늘날의 예술 출판이 예술에 대한 섬세한 발견보다는,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지적 분석을 택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미술 시장이 예술가들을 고립시키고, 때로는 예술가들을 반향실 안에 가두고, 지나치게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아티스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도 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아티스트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원칙은, 접근하기 쉬운 출판물을 부활시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의 미공개 작품을 독자에 소개하며 그들의 작품에 독자들이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친밀한 관문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기획과 출간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나요?
“콘셉트가 확정되고, 아티스트와 논의해 제작해 서점에 출시되기까지 거의 2년 걸렸습니다. 아티스트의 신뢰를 얻고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시간과 지원을 제공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또 마그마는 자체 출판사와 자체 제작 능력을 갖춘 독립 출판물입니다. 제작과 인쇄에 더 오랜 기간을 할애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이 작품 중 일부는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입니다. 예를 들어 안드라 우르수차가 제작한 작품은 각 사본마다 다릅니다. 출판물 전체에 걸쳐 매우 정교한 인쇄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는 것과 같은 매우 촉각적인 경험도 만들었습니다. 저희의 목표는 매년 한 호씩 발행하는 것입니다. 이 발행 주기는 또한 MAGMA의 핵심 원칙을 반영합니다: 즉시성이 요구되는 세상에서(in a world of immediacy) 우리는 다시 한 번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다음 호에서는 2차원 물체의 전통적인 한계를 더욱 뛰어넘어 책이라는 물체가 얼마나 놀랍고, 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전달과 공유에 얼마나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는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출판물 ‘마그마’의 표지.

―많은 사람들이 인쇄물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출판 업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생산 비용은 증가하고 독자층은 감소하고 있으며 종이 공급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와 디지털 미디어와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요인은 출판 산업의 취약성에 기여하지만, 동시에 출판 산업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투자해야 할 필요성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MAGMA의 발행은 까다로운 출판물을 계속 구매하고 지지할 의향이 있는 대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짧은 형식의 영상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3시간이 넘는 영화에 대한 영화관의 수요가 증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식과 내용을 결합하여 더 깊은 사고와 만남, 관심을 유도하는 책에 대한 욕구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안심이 되지만 동시에 도전이기도 합니다. 마그마는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하고 예술가와 독자 모두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인쇄 출판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를 신뢰하고 지원해준 보테가 베네타 측에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 역시 온라인 매체가 익숙할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저는 책과 신문을 인쇄된 형태로 읽는 편입니다. 동시에 우리 세대는 가상(virtuality)이 세상과의 주요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매우 의심스러운·highly questionable) 생각을 가지고 자란 것이 사실입니다. 우정, 연애, 미적, 지적 발견, 업무, 오락 등 모든 수준의 인간 상호 작용이 디지털 세계의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상성이 발전함에 따라 제 세대를 포함하여 유형물(materiality)에 대한 욕구도 점점 더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환경 문제가 이에 대한 좋은 예이며, 그 예는 계속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술가는 예술을 창작할 때 자신의 몸과 감정(배고픔, 갈증, 고통, 슬픔, 우울, 기쁨)을 경험하고 공간을 이동하며 모든 구성 요소에서 세상을 느끼지만, 기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MAGMA의 선언문은 이것을 주장합니다: ‘모든 것이 클릭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때, MAGMA는 연간 발행이라는 긴 안목을 제공합니다. 기계에 기반한 인공 지능이 아닌 진정한 예술적 감성만이 존재합니다.’”
폴 올리벤느가 지난 7월 발간한 출판물 ‘마그마’의 속지. 폴 올리벤느는 이 출판물을 책의 형태를 띠는 예술적 표현을 위한 포럼이자 미학적 선언문이라고 말했다./보테가베네타 제공

―비슷한 관점에서, 0과 1의 디지털 세계에 사는 많은 디지털 혁신가와 혁명가(disruptor)들 중에도 문화적 감수성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는 18세기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술 전문가들의 예술적, 문학적 성향은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서예와 밥 딜런의 음악에 매료되었습니다(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생전 대화 등을 모은 ‘Make Something Wonderful(멋진 것을 만드세요)’*이라는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정말 흥미롭습니다.”
*지난 4월 출간된 이 책은 스티브 잡스의 아내인 로렌 파월 잡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조너선 아이브 애플 전 최고디자인책임자가 공동으로 참여해 스티브 잡스의 연설과 인터뷰, 서신을 모아 전자책으로 발간했다. 194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스티브 잡스의 어린 시절부터 시간 순으로 정리됐으며 다양한 사진으로 그의 숨은 일상과 철학을 다시금 새길 수 있다. 일부 오프라인으로 발간된 책은 애플 직원을 위해 특별히 제작됐다. 아이폰, 킨들 사용자 등은 애플북스 등을 통해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고, 스티브 잡스 아카이브에서 전자책 형태로 읽을 수 있다.
―유명 전시기획자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서문에 쓴 “1+1=11″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레바논계 미국 시인이자 수필가, 화가인 에텔 아드난(Etel Adnan·1925~2021)의 말을 인용한 것 같습니다. ‘세상은 분리가 아니라 함께, 의심이 아니라 사랑, 고립이 아니라 공동의 미래가 필요하다(The world needs togetherness, not separation. Love, not suspicion. A common future, not isolation)’. 우리가 단결하고 서로를 더할 때 더 강해진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을 큐레이터라기보다는 조력자(facilitator)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과 작품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책 ‘싯다르타’에서 지혜를 배운다는 것은 강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구절이 기억납니다. 뱃사공이 싯다르타에게 가르친 인생이지요. MAGMA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기성 작가와 신진 작가를 포함한 장르와 세대 간의 대화를 고집한다는 점입니다. 예상치 못한 만남, 그러나 그 만남에서 의미와 영감, 친밀감을 얻을 수 있는 만남을 장려하는 것이 이 출판물의 중요한 가치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예술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공유해야 하는지,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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