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테가 베네타
2027 여름 컬렉션
검은 밤을 향해 가던 이탈리아 밀라노 9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이탈리아 하이엔드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쇼장은 눈이 부실 만치 거대한 하얀색 큐브였다. 그 안에 가지런히 놓인 것은 레진을 입힌 골판지 상자들이었다. 베를린 출신 작가 일리야 골드만 구빈이 하나하나 직접 품에 안아 구겨 놓은, 세상에 둘도 없는 ‘포옹의 흔적’이 남은 의자였다. 그 위에는 손으로 빚은 가죽 꽃 한 송이씩이 놓여 있었다. 쇼가 끝나자 관객들은 그 꽃을 조용히 챙겨 집으로 가져갔다. 사랑의 징표를 건네는 가장 보테가 베네타다운 방식이었다.
◇삶의 무게를 겪어낸 가벼움
첫 두 시즌에서 그녀는 보테가 베네타라는 거대한 공방이 어디까지 팽창할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재활용 유리 섬유로 짠 프린지는 “모피처럼 느껴지고 유리처럼 움직인다”고 그녀는 말했다. 뱀 비늘처럼 짠 인트레치아토 코트, 바닥까지 끌리는 초극세 가죽 케이프, 깃털을 단 데님 블루 로브 코트. 그것은 백지 위에 자신의 서명을 강요하는 폭력적 ‘리셋’이 아니라, 아틀리에의 극한을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었다. 볼륨과 텍스처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만이 무엇을 덜어내도 되는지 안다.
이번 시즌 그녀의 컬렉션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문장은 이탈리아 언론인이자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1923~1985)가 설파한 ‘가벼움’에 대한 고찰이었다. 그는 작고하기 직전 하버드대 강연을 위해 준비한 ‘다음 천년을 위한 여섯 가지 메모’의 첫 장을 ‘가벼움’에 바치면서 “나의 작업 방식은 대개 무게를 덜어내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에게 가벼움은 삶의 고통과 역사적 비극을 온몸으로 겪어낸 문장의 경계에서 무거움을 깊이 인식한 뒤 도래하는 정신적 초월과 유연함을 뜻한다. 그는 이 가벼움이 경박함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려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문장을 빌려 왔다. “깃털처럼이 아니라, 새처럼 가벼워야 한다.”
트로터의 2027 여름 컬렉션에 이보다 잘 맞는 문장은 찾기 어렵다. 이번 시즌 가벼움은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었다. 뼈와 근육을 지닌 채 공기를 가르는 새의 가벼움이었고, 계산하고 설계해서 얻은 가벼움이었다.
출발점은 소박했다. 영국 출신인 트로터는 밀라노에서 1년을 살며 사계절을 몸으로 겪었다. 그녀가 쇼에 앞서 밝힌 주제는 “보호의 계절인 겨울에서 봄과 여름으로 넘어가며 옷을 벗어 가는, 그사이”였다. 쇼는 이 문장을 시간 순서대로 걸어 나갔다. 어깨에 힘을 준 코트로 시작해, 한쪽 밑단을 무심히 묶어 올린 코트를 지났다. 보그는 이 코트를 두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듯하다”고 썼다. 그사이 줄무늬 셔츠 위에 겹친 라일락 톱과 버터 옐로 바지가 봄이 왔음을 알렸다. 허리에 주름을 잡아 옆으로 묶은 새빨간 코튼 드레스가 그 뒤를 이었다. 쇼는 흰 수제 레이스와 굵은 크로셰, 실크 프린지가 흔들리는 한여름에서 끝났다. 하나의 컬렉션이 한 해를 통과한 셈이다.
리넨처럼 보이는 버건디 코트는 빛에 비추면 햇살이 새어 들어올 만큼 가늘게 자른 나파 가죽 띠로 짜여 있다. 인트레치아토 튜닉을 엮은 것은 가죽도 울도 아닌 실크 포플린 띠다. 화사한 셔츠는 코튼 대신 실크 태피터로 지어 무게를 한 겹 더 덜어냈다. 트로터는 아틀리에에 가죽을 “만들 수 있는 한 가장 가볍게” 깎아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글로벌 패션지 ‘엘르’는 이 가벼움이 시스루 소재에 기댄 것이 아니라 오직 질감과 움직임에서 나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같은 시즌 밀라노의 많은 쇼가 비치는 천으로 여름을 표현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트로터의 방식이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그녀는 하우스의 기술을 내려놓아서 가벼움을 얻지 않았다. 기술을 더 깊이 밀어붙여서 무게를 지웠다. 이번 시즌 보테가 베네타의 기술력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예는 우리의 언어이자 로고”라는 그녀의 말은 수사가 아니다.
그녀는 뉴욕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느린 진화’를 언급했다. 패션계가 기술 경쟁에 몰두한 지금, 이 느림은 그 자체로 숙고하는 혁명이다. 매 시즌 더 많은 것을 얹어 존재를 증명하려는 하우스들 사이에서, 트로터는 덜어냄으로써 자신을 드러냈다. 평단도 이를 알아보았다.
트로터에게 늘 엄격했던 ‘더 컷’의 캐시 호린은 이번 리뷰에 “루이스 트로터, 가벼워지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밀라노에서 “가장 신선한 색”을 보았다고 썼다.
루이스 트로터가 애호하는 뉴트럴과 토마토 레드 위에 울트라바이올렛과 선샤인 옐로, 라일락이 햇살처럼 쏟아졌다. 그 빛이 가장 아름답게 들어온 순간은 모델 마리아카를라 보스코노가 걸어 나올 때였다. 밀빛 바지에 파란 코튼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연분홍 실크 셔츠를 겹쳤고, 머리는 풀어 내렸다. 꾸미지 않은 듯한 그 모습 앞에서 관객은 오히려 숨을 죽였다. 트로터는 이 느낌을 “조금은 풀어진 느낌”, “정제된 언어와 유기적인 언어 사이”라고 불렀다. 단추를 하나 풀어헤친 셔츠, 굽 낮은 슬립온, 꼭 필요한 것만 담는 납작한 가방이 같은 태도를 보여 준다. 정교하게 지은 옷을 느슨하게 입히는 방식에 그녀가 생각하는 동시대의 우아함이 담겨 있다. 남성복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더 가볍고, 더 날렵하고, 조금 더 보헤미안에 가까워졌다.
트로터는 올해 초 방한 당시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처럼 하우스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제 창의성을 통해 그 영혼에 밀착해 오늘날 보테가 베네타의 목소리가 되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보테가 베네타 하우스엔 비범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비범한 장인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비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엮어내려 합니다.” 반년이 지나 밀라노의 하얀 방에서 본 것은 정확히 그 문장의 실현이었다. 비범한 기술로 짠 평범한 셔츠, 평범한 치노 팬츠 위에 얹힌 비범한 재킷. 가죽과 라피아 토트백은 두 배로 커졌고, 스타일링은 폴리시(polish)와 오가닉(organic) 사이를 오갔다. 트로터는 그것을 “조금은 흐트러진 느낌”이라 불렀다.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은 사이드 심이 열리며 안감의 프릴과 가봉실을 드러냈고, 바느질의 작은 불완전함은 감추지 않았다. 손이 닿은 자리를 지우지 않는 것, 그것이 이번 시즌 트로터식 완벽주의였다.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던 페넬로페는 낮에 베를 짜고 밤에 풀었다. 성급한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지연의 전술이었지만, 그 반복 속에서 그녀는 누구보다 베틀을 깊이 알게 됐다. 트로터의 세 시즌은 그것과 닮았다. 짜고, 풀고, 다시 짜는 동안 그녀는 보테가 베네타라는 베틀의 모든 실을 손에 익혔다. 보테가 베네타의 쇼 노트는 이번 시즌 인트레치아토를 이렇게 정의했다. “물질이 짜이듯, 분야와 몸짓과 사람도 짜인다.”
그래서 세 번째 시즌의 가벼움은 후퇴가 아니라 통제다. 아틀리에의 능력을 완벽히 이해한 뒤에야 가능한, 원하는 무드로 그 능력을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영국 선덜랜드 출신 디자이너 특유의 ‘느린 진화’와 아카이브에 대한 존중은 이제 보테가 베네타라는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서사가 됐다. 도전에 도전을, 그 위에 다시 도전을 더해 자신의 성(城)을 쌓아 올리는 사람. 그 성의 벽은 돌이 아니라 빛이 통과하는 가죽으로 지어졌다. 조급한 패션계가 그녀를 기다려 주며 “루이스 트로터가 보테가 베네타에서 보여준 최고의 쇼”(패션 매체 ‘후 왓 웨어’) “루이스 트로터의 보테가 베네타가 만개(bloom)했다”(‘어나더 매거진’) 등 극찬을 보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2027 봄여름 패션 위크]
‘가벼움’이 런웨이를 지배했다
올여름 한국은 물론 유럽까지도 뒤덮은 폭염은 그간 ‘트렌드가 없는 것이 트렌드’로 지배했던 런웨이(패션쇼 무대)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지난 9월과 10월에 이탈리아 밀라노·프랑스 파리에서 펼쳐진 2027 봄여름 패션 위크에서 가장 두드러진 단어를 꼽자면 바로 ‘가벼움’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것을 살짝 내려놓으면서까지, 미래를 위해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를 미학적으로 탐구하는 장이었다. 파리 패션 위크의 대미를 장식한 루이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쇼가 끝난 뒤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갑옷 같은 패션, 강인한 건축적인 패션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하지만 올여름, 우리 모두는 ‘다른 옷’이 필요하다고 깨달은 것 같습니다.”
디올의 조나단 앤더슨 역시 비슷했다. 브랜드의 시그니처 바 재킷을 비롯해 대부분 초경량 소재로 제작했다. 많은 피스들이 신발 상자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라고 언급했다.
소재 개발도 이어졌다. 에르메스의 아티스트 디렉터 나데주 바니 역시 섬세한 가죽 패널이 들어간 얇은 그물망 니트 드레스 등 공기가 통하는 가벼운 옷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한국 등지를 다니며 느꼈던 경험을 컬렉션에 담아냈다. 샤넬의 마티유 블라지는 착용할 때 가벼움에 무게를 뒀다. 신예 모델 우르부셰르는 오프닝에서 화이트 슬립 차림으로 등장하더니, 클로징에선 블랙 샤넬 부클레 스커트 슈트 룩으로 쇼를 마쳤다. 트위드로 보이지만, 하우스의 전문가들이 스포츠웨어의 신축성과 편안함을 고려해 만든 신소재였다.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 듀오가 이끄는 로에베는 초미니 드레스와 테크니컬 파카, 멀티 컬러로 레이어드된 민소매 드레스 등으로 그들만의 유쾌한 가벼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토즈의 마테오 탐부리니는 ‘욕망이 어떻게 스타일을 만들어가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포멀한 요소의 경직됨은 덜어내고 세련된 감각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