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게
트래디션 컬렉션 신제품
전통을 현재형으로 바꿔 말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스위스 하이엔드 워치메이커 브레게가 새롭게 선보인 ‘트래디션(Tradition) 컬렉션’은 이에 대한 가장 적확한 정답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 첫선을 보인 이후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의 이정표가 된 트래디션 컬렉션은 창립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혁신적인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21세기 수집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투영한 현대적 미학으로 무장했다. 지난 3월 31일 전 세계에 공개된 이번 신제품들은 7037, 7097, 7038, 7067 등 네 개 모델로 구성됐다.
“브레게의 DNA를 다이얼 위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컬렉션”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들 신제품은 1799년에 고안된 ‘택트 시계(Tact watch)’ 에서 영감을 받았다. 당시 천재적인 시계 발명가이자 과학자, 워치메이커였던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착용자가 촉감만으로도 시간을 알 수 있는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계인 ‘택트 시계’를 개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시계 케이스 외부의 포인터에는 아워 핸드의 위치가 반영된 형태. 착용자는 포인터의 위치를 촉감으로 감지해 인덱스 부분의 스터드를 기준으로 포인터의 위치를 파악하여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방식이다. 1799년에 출시된 이후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계’라고 알려지기도 했던 택트 시계에는 에나멜, 펄, 다이아몬드 등 다양한 고급 장식이 더해졌다. 터치 시스템은 몇 가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특성상 절제되고 심플한 스타일의 시계에 제한적으로 적용됐다.
이번 트래디션 신제품은 과거 회중시계로 고안된 택트 시계를 손목 위로 옮겨오며 또 한 번의 역발상으로 창의적인 순간을 맞는다. 다이얼 뒤에 숨어 있을 칼리버를 반전시키는 ‘반전의 묘미’를 선사한 것. 브릿지와 기어트레인, 배럴과 이스케이프먼트 등 복잡한 무브먼트 구성 요소를 다이얼 전면에 과감히 드러냈다. 글로벌 시계 전문 매체 ‘워치 타임’은 “현대 오픈워크 미학을 선도한 시계”라면서 “‘기계적 투명성, 대칭, 명료함’이라는 브레게의 원칙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결과”(워치 타임)“라고 평했고, ‘모노크롬’은 “동시대적인 컬렉션으로 재탄생했다”고 짚었다.
◇화이트 그랑푀 에나멜 다이얼, 아라비아 숫자… 브레게의 역사성을 현대적 구조미로 구현한 ‘트래디션 7037’
이번 신제품의 미덕은 과감한 변신보다 절제된 업데이트에 있다. 그 변화의 핵심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모델은 ‘트래디션 세컨즈 레트로그레이드 7037(트래디션 7037)’이다. 38mm 케이스에 시·분과 레트로그레이드 스몰 세컨즈만을 남긴 이 시계는, 오히려 덜어냄으로써 트래디션의 구조미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번 7037에 컬렉션 최초의 올-블루 무브먼트를 적용했고, 화이트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과 아라비아 숫자를 더해 차갑고 맑은 대비를 완성했다. 글로벌 시계 전문 온라인 매체인 ‘프라텔로’의 평가를 눈여겨볼 만하다. 프라텔로는 이 모델을 이번 신작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버전으로 꼽으며, 화이트 골드와 화이트 에나멜, 블루 ALD 처리 무브먼트가 만드는 콘트라스트를 높이 평가했다. 더 아워 마커스는 “마감과 기술의 완성도가 뛰어나다”면서 “7037의 블루 ALD 처리 무브먼트와 핸드 기요셰, 개별 소성되는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을 예로 들며, 이 시계들이 가격을 설명하는 방식은 희소성을 넘어 압도적인 제작 밀도에 있다”라고 평했다.
브레게는 이렇게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컴플리케이션 없이, 오픈 다이얼을 특징으로 한 새로운 차원의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었다. 메인플레이트는 샷블라스트 기법, 브릿지는 새틴 마감 기법, 배럴 커버는 ‘스네일(snail)’ 패턴의 수공 기요셰 기법으로 처리됐다. 모든 부품은 수작업으로 마감된 것은 브레게의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화이트 골드 베이스 위, 12시 방향에 자리잡은 아워 다이얼이다. 이 다이얼은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기요셰 기법 대신 전통적인 화이트 그랑푀 에나멜로 제작됐고, 로마숫자 대신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했다. 현대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1783년 브레게가 고안하여 1799년 시계에 직접 사용했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역사적 전문성과 현대의 기술을 결합하여, 과거의 비전을 현재 세대의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1799년에 이미 사용했던 아라비아 숫자는 당시로는 정말 파격적인 결정이었지만, 이번 신제품에선 현대성을 가미한다. 워치메이커 브레게와 매뉴팩처 브레게를 강력하게 이어주는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브레게가 아라비아 숫자를 선택했다는 점은 250년이 넘는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현대성을 향한 열망을 동일하게 담아낸다. 1783년 장인이 고안한 아라비아 숫자는 이후 수많은 다른 워치 메이커들에게서 채택되며 워치메이킹 업계 전체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발명품이 됐다. 시계 전문 매체 ‘더 아워 마커스’는 “특히 인상적으로 짚은 부분은 브레게가 역사를 장식처럼 소비한 것이 아니라, 창립자가 실제로 사용했던 아라비아 숫자와 에나멜이라는 언어를 다시 설계의 논리로 끌어왔다”고 진단했다.
케이스백에서도 동일한 접근법이 돋보인다. 무브먼트는 반달 모양의 로터를 자랑스럽게 드러내어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고안한 디자인을 그대로 반영했다. 로터는 창업자의 천재성을 다시금 선보인다. 우선 오토매틱 시계 그 자체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에 앞서 다른 워치메이커들이 오토매틱 시계를 구상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몇 점 존재하기는 하지만, 1780년 이전에 제작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브레게 1/8/82는 의심할 여지 없이 현존하는 역사상 최초의 퍼페추얼(perpetual), 즉 명백한 오토매틱 시계다. 현재 이 작품은 방돔 광장에 위치한 브레게 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두 번째는 로터에 플래티넘 소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18세기 말, 플래티넘은 혁신적인 소재였다. 1780년 당시에는 이를 생산하는 공정이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무브먼트의 성능을 최적화하기위해 끊임없이 혁신적인 기술적 솔루션을 모색하던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플래티넘이 골드보다 밀도는 30% 높고, 스틸보다 약2.5배 무거워 퍼페추얼 시계에 더 우수한 와인딩 성능을 제공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브레게 매뉴팩처는 이 소재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간 동시에, 여전히 수많은 로터에 플래티넘이 사용되는 만큼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떨치는 그의 선구적인 재능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38mm 골드 케이스를 장착한 트래디션7037은 라이트 그레이 컬러 스티치 장식이 돋보이는 블루새들스타일 러버스트랩과 함께 제공되며, 화이트 러버스트랩 옵션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1800년대 ‘오스만 시계’ 모델 속 오리엔탈 숫자의 현대화… ‘트래디션 GMT 7067’
무엇보다 화제가 됐던 제품은 ‘트래디션 GMT 7067’. 트래디션 최초의 그린 그라데이션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을 적용됐다. 중심부의 소나무빛 그린이 바깥으로 갈수록 블랙으로 스며드는 이 변화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에나멜 파우더의 배합과 온도를 분 단위까지 정밀하게 조절하는 소성 조건을 극도로 정밀하게 제어해야 가능한 기술적 성취다.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이 다이얼은 케이스에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제작 난이도가 훨씬 높아진다는설명이다.
7067 GMT 모델의 그린 그라데이션은 에나멜 파우더의 미세한 층적과 온도 조절이 필수적으로, 이는 기성 브랜드가 흉내 낼 수 없는 독립 워치메이커 수준의 예술성을 담고 있다. 7067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미학만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까지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로컬 타임과 홈 타임, 낮/밤 표시를 갖춘 이 모델은 실용적인 GMT이면서도, 홈 타임 서브다이얼에 아라비아 숫자 혹은 오리엔탈 숫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메인 다이얼에는 로컬 타임이 표시되고, 8시 방향의 서브 다이얼에는 홈 타임이 표시된다. 그리고 10시 방향에 위치한 절제된 디자인의 낮/밤 인디케이터가 디스플레이를 완성한다.
인디케이터 근처에는 +/- 1시간 단위로 움직여 컴플리케이션을 설정하는 크라운이 자리잡고 있다. 트래디션 GMT 7067 모델의 경우 홈 타임은 아라비아 또는 오리엔탈 숫자의 두 가지 서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오리엔탈 숫자는 브레게의 현대 시계에서는 만나보기가 어렵지만, 사실 1800년대 초부터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오스만 제국의 고객들에게 직접 선보였던 진정한 맞춤 제작 디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오스만 시계’로 알려진 모델들은 에나멜 다이얼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오리엔탈 숫자가 특징이다. 오늘날 브레게는 19세기 초 마스터 워치메이커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아라비아반도의 고객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맞춤형 장인 정신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한다.
듀얼 타임 존 기능 또한 마스터 워치메이커의 유산으로 손꼽힌다. 이는 1815년 루이 18세로부터 왕정 해군을 위한 워치메이커로 임명된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칭호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임무는 1884년에 향후 ‘타임 존’으로 불리게 될 영역을 정밀하게 횡단하는 것이었다. 이는 항공 분야의 선구자로서 선구적인 국제 비행에서 듀얼 타임 시계를 필수적으로 사용했던 루이 샤를 브레게(Louis Charles Breguet)와 자크 외젠 앙리 브레게(Jacques Eugne Henri Breguet)의 아버지인 앙투안 브레게(Antoine Breguet)의 유산을 계승한 것이다.
40mm 플래티넘 케이스를 갖춘 트래디션 GMT 7067은 그린 컬러스티치를 장식한 블랙러버스트랩 버전으로 출시된다. 착용 경험의 현대화도 트래디션 컬렉션이 시장에서 주목받는 이유다. 이번 컬렉션에는 트래디션 최초로 러버스트랩이 도입됐고, 이는 단순한 소재 변경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는 가죽 스트랩 위주의 드레시한 컬렉션이었던 트래디션에, 실제 주말에도 착용 가능한 성격까지 더하는 것이다. 롭 리포트는 “스트랩 변화는 트래디션의 인상을 ‘좀 더 편안하고 오늘적인 럭셔리’로 바꿔놓는다”고 설명했다.
◇블랙 아벤추린 글라스의 ‘트래디션 7038’·차콜 그레이 배럴 커버 ‘트래디션 7097’
보다 장식적인 해석을 원한다면 ‘트래디션 세컨즈 레트로그레이드 7038(트래디션 7038)’이 있다. 셀프 와인딩 브레게 칼리버 505SR을 탑재한 트래디션 세컨즈 레트로그레이드 7038은 37mm 18K 로듐 도금화이트 골드 케이스에 58개의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베젤, 25개의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버클, 그리고 컬렉션 최초의 블랙 아벤추린 글라스 다이얼을 조합했다. 직경 32.8mm로, 보석으로 장식된 크라운 역시 화려함을 더한다. 하지만 이 시계가 단지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브레게는 공식 자료에서 7038을 오뜨 오를로제리와 주얼리의 결합으로 소개하며, 선버스트 기요셰 배럴 커버와 반달형 오실레이팅 웨이트까지 일관된 미학으로 설계했음을 강조한다.
다이얼 중앙에 위치한 배럴 커버는 햇살 모양의 모티프를 연출하는 ‘선버스트’ 기요셰 패턴으로 장식해,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시계 다이얼에 처음 도입한 탁월한 장인 기술인 기요셰 기법에 경의를 표한다. 기요셰는 브레게의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핵심요소로 자리잡았는데, 브레게는 현재 가장 큰 규모의 기요셰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트래디션 세컨즈 레트로그레이드 7038의 뒷면은 앞면 못지않게 매혹적인 기계적 풍경을 펼쳐보인다. 오직 시계의 소유자만이 볼 수 있는 정교한 장인 기술이 담겨 있는 것. 로터는 베이스 플레이트와 샷블라스트 처리된 브릿지 위에 떠 있는 듯 배치되어 있으며, 앞면과 마찬가지로 밀도 높은 블랙 컬러 마감으로 더욱 강조된다. 골드로 제작된 로터는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활약했을 당시 설계된 로터를 연상시킨다.
‘트래디션 세컨즈 레트로그레이드 7097(트래디션 7097)’은 무브먼트에 새로운 마감 기법을 적용해, 챠콜 그레이 배럴 커버가 새롭게 도입됐다. 40mm 직경 다이얼. 새로운 화이트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과 대비를 이루며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번 트래디션 컬렉션 신제품의 다른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다이얼 아래에 숨겨져있는 브릿지, 휠, 이스케이프먼트, 배럴 등 기타 무브먼트 부품들을 겉으로 드러낸다. 오픈 팁 브레게 핸즈를 통해 표시되는 시와 분은 모델의 이름에 영감을 준 요소이기도 한 10시 방향의 세컨즈 레트로그레이드 디스플레이와 조화를 이룬다.
트래디션 7097은 이번 라인업 가운데 가장 세련된 색감의 균형을 보여준다. 동일한 건축적 철학 안에서 소재와 컬러, 마감의 차이만으로 얼마나 다른 성격을 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셈. 브레게가 강조하는 무브먼트의 ‘키네틱 하모니(움직임의 조화)’를 제대로 보여주는 라인이기도 하다. “여러 마감과 장식 요소를 조합하면서도 결코 과밀하거나 산만하게 만들지 않는 브랜드”라는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찬사는 트래디션 컬렉션 뿐만 아니라, 브레게의 DNA를 단번에 말해준다.
세계적인 옥션인 ‘세바스찬 찰스’는 이번 트래디션 신제품에 대해 “오픈워크 다이얼과 정교한 수작업 마감을 특징으로 하는 트래디션 컬렉션은 250주년 역사의 기념비적인 제품 중 하나로 꼽히며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선호도를 보인다”고 평가했다. 트래디션은 ‘전통’이란 뜻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동시대의 언어로 번역한다. 현재도 미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트래디션’이 된다는 것을 이 트래디션 컬렉션은 가장 우아하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