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미
37년 디자인 인생 철학 담은 첫 플래그십 스토어 선보여
패션계에 ‘우영미’는 독특하다. 남성 디자이너가 득세하는 글로벌 명품 무대에서 거의 드문 여성 디자이너이자, 게다가 남성복 디자이너로는 더욱 희귀하다. 이미 20여년 전 패션계 최고 디자이너들만 설 수 있다는 파리패션위크 공식 데뷔한 스타 디자이너이자, 37년간 자신의 레이블을 이끄는 현역 디자이너이며 여전히 독립 브랜드를 운영하는 경영자다. 이 모든 걸 한 사람이 해낸다는 건 패션사에 다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일무이하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역량을 또 한 번 펼쳐냈다. 디자이너 우영미가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우영미(Wooyoungmi)’의 첫 번째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 ‘우영미 이태원’을 통해서다. 서울 이태원에 들어선 이 건물은 높은 천장과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빨간 커튼 등을 통해 수직적 공간감과 수평적 확장성을 품어낸다. 37년의 철학이 응축된 이 공간에서 최근 만난 그녀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은 것 같다”며 웃었다. 1층 리셉션의 소파와 테이블은 아티스트 최동욱과 협업해 그가 직접 디자인했고, 매장 안에 쇼피스(쇼에 등장했던 의상)를 전시하는 아카이브 홀을 둬서 쇼 무대 위 세계관을 직접 만날 수 있게 했다. 2층과 3층은 여성복과 파리 컬렉션 주요 룩, 4층은 카페 드 우영미가 들어섰고, 이태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루프탑에는 조경·공간·리빙 전문가인 ‘디자인 알레’(우경미·우현미 소장)가 도심 속 정원을 연출했다. 지하층에는 세계적인 미슐랭 스타 셰프인 알랭 뒤카스와 협업한 레스토랑이 내년 초 들어설 예정이다.
간결한 재단 재킷에 숏커트 헤어, 검은 선글라스까지 빈틈 하나 없어 보이는 그녀가 “지독하게, 처절하게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불투명 유리 블록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음조의 변화가 크게 없는 우아한 말투로 살짝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건, 극한의 고통을 견뎌낸 자만 구현할 수 있는 해탈의 자세다. “아무런 네트워크도, 전례도 없었어요. 10년을 매일 울었어요.” 프랑스인들의 까칠함과 텃세, 인종 차별, 언어 장벽 모든 것이 그녀 앞에 있었다. 하지만 영혼을 가장 갉아먹는 건 내면 깊숙이 새겨진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었다. “열등감 덩어리였어요. 우리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선진국을 따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를 지탱한 건 명상과 수행이었다. 시차 때문이건,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건 새벽 4시면 눈이 떠졌다. 108배를 하고, 금강경을 읽고, 양자역학에 관한 어려운 책들까지 끄집어 읽었다. 이 고통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강력한 디자인 철학을 빚어냈다. 바로 ‘포용성(inclusivity)’이다.
“젊었을 땐 저도 뾰족했어요. ‘이거 아니면 안 돼’ 식이었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엄마이자 여자로서 모든 걸 끌어안는 ‘보자기’ 같은 DNA가 생겼어요. 패션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진화’이고, 진화하려면 ‘오픈 마인드’와 ‘포용성’이 필요해요.” 스스로를 버릴 필요가 없었다. 한국적인 정체성을 담아 서구적인 것과 조화시키는 하이브리드, 젊음과 나이 듦, 여자와 남자를 큰 그릇으로 담아낸다. 그러고 보니 스위스 건축사무소 ‘스토커 리 아키테티’가 설계한 ‘우영미 이태원’은 유연해진 그녀의 마음을 그려낸 듯했다.
이번 ‘우영미 이태원’ 오픈을 맞아 유럽에서 온 프레스들은 우영미의 성공에 놀라움을 표했다.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글로벌 패션계에서 여성 디자이너가 독립 브랜드를 키워낸 건 해외 프레스들이 입모아 말하듯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4년 전 파리 컬렉션을 시작한 솔리드옴므는 ‘우영미 하우스에서 나온 브랜드’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곧 갤러리 라파예트 단독 입점도 예정되어 있다. 현지인들은 신생 브랜드인줄 알았던 솔리드 옴므가 37년 전 서울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고 한다. 그만큼 시대를 뛰어넘으면서도 현재성 있다는 것이다.
한국 패션사를 새로 쓰는 우영미. 그녀는 ‘어떤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 여자는 옷으로 사람을 참 행복하게 해줬어’ ‘그 옷을 입을 때 자존감이 생겼어’…. 그렇게 기억된다면 디자이너로서 최고의 훈장이라 생각합니다. 옷은 결국 입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자존감을 올려줘야 해요. 그게 디자이너의 소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