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셀 뒤마 에르메스 회장

#1970년대 후반 프랑스의 한 초등학교. 수업 중 한 선생이 8살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여러분 생각에 파리에서 가장 큰 상점은 어디인가요?” 반 아이들 대부분은 파리의 내로라하는 백화점 이름을 댄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에르메스요!” 그 답을 들은 선생은 “에르메스는 작은 상점인데, 혹시 너희 어머니께서 일하시는 곳이니?”라고 반문한다. 선생의 반응과 친구들의 놀림에 얼굴이 빨개진 그 아이의 이름은 악셀 뒤마. 에르메스 창업주 피에르 에르메스의 6대손이다. 따지고 보면, 선생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이 그의 어머니는 에르메스 전 제품 총괄을 맡고 있었다.
#2010년 10월 프랑스의 럭셔리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는 “에르메스 지분 14.2%를 인수했다”고 발표한다. 기존 2.9%까지 합치면 보유 지분 17.1%. 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우호적인 단순 투자”라고 밝혔지만, 에르메스 측은 ‘적대적 M&A’라며 법적 소송에 나섰다. 1837년 창업주 티에리 에르메스의 공방에서 시작된 에르메스 가문이 보유한 지분율은 73.4%. 하지만 100여명에게 분산돼 있었다. 에르메스 일가는 합심해 지분 50.2%를 모아 지주회사를 만든다. 오너 일가의 적극 방어로 결국 2014년 법원 중재를 통해 4년간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다. LVMH가 보유한 지분 23%를 자사 주주에 분산시킨다는 합의안이었다.
어린 시절 선생이 말한 ‘작은 상점’ 에르메스를 현재 전 세계 49개국 310개 매장을 통해 지난해 기준 152억 유로(약 24조원) 매출 규모의 대형 그룹으로 성장시키고, 가문을 설득해 LVMH와의 소송전 승리를 이끌어낸 주역, 바로 악셀 뒤마(Dumas·55) 에르메스 회장이다. 2003년 당시 회장이었던 에르메스 5대손이자 그의 삼촌 장 루이 뒤마의 부름으로 에르메스에 합류한 뒤 2014년 회장에 취임했다. 현재 럭셔리 업계가 가장 닮고 싶어하는 인물로 꼽히는 뒤마 회장을 얼마 전 방한한 자리에서 단독으로 만났다.
―취임 무렵 한국을 찾은 이후 방한은 처음이다. 에르메스로서도, 한국 K컬처의 위상도 그 사이 많은 질적·양적 성장이 있었다.
“서울 도산 메종이 오픈한 2006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는데, 당시만 해도 전 세계 4번째 에르메스 메종을 한국에 오픈한다는 것을 다소 이례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우리에게 한국은 언제나 특별한 존재다. 파리 이외의 도시에서 큰 행사를 계획할 때면 우리는 항상 서울을 후보지로 고려한다.”
―LVMH와의 기나긴 소송 뒤에 회사를 지켜낸 지 10년여가 지났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봤을 때 회사를 이끌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에르메스의 독립성을 지켜냈을 때. 어느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렵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우리의 역사는 계속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해 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에르메스의 성장과 이를 가능케 한 모든 제품군의 눈부신 성공도 큰 기쁨이다, 다만 이러한 성공은 모두의 성과이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히 나의 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려웠던 시기는?
“가장 최근이라면 역시 팬데믹 당시. 에르메스의 모든 공방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는데, 내가 폐쇄 결정을 내린 직후 불과 3시간 만에 에르메스 전체가 폐쇄됐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내가 원래는 숙면을 취하는 편인데, 그 당시 매일 밤마다 돌아가신 삼촌과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셨다. 자동차 키를 주셨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꿈속에서 자동차에 시동을 걸 수 없었다. ‘시동이 안 걸리네!’라고 되뇌며 안타까워했다. 이후 모든 활동이 정상적으로 재개됐고, 코로나 이후 에르메스는 훌륭한 실적을 거뒀다.”
―에르메스는 위기에도 항상 건재해 보여, 그러한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에르메스의 역대 모든 회장은 공교롭게도 위기의 상황에서 취임하고 이를 극복해냈다. 제 증조부이신 에밀 에르메스 회장님은 마차가 자동차로 대체되던 시기에 회장직에 오르셔서 에르메스의 재창조를 도모하셨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에르메스가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던 시점에 회장으로 취임하셨다. 1929년 집안의 자산을 전부 미국에 투자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삼촌께서 회장으로 취임하신 1978년에는 회사의 사정이 좋지 못했는데, 삼촌께서 놀라운 수준으로 회사를 성장시키셨다.”
―후계자 교육을 위해 에르메스 가문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나 문장, 혹은 가훈이 있다면?
“사실 성공에 이르게 하는 마법의 문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처음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 에르메스의 주요 가치들을 정의하기 위해 회사에서 이미 컨설턴트를 고용한 상태였다. 컨설턴트들은 조사·연구 뒤 ‘미션을 수행하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선 보통 모두가 공감하는 다섯 개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 다섯 개를 추려내기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에르메스에서는 무려 84개의 가치를 찾아냈다.’ 각자의, 또 각 세대가 수호하는 자신들만의 가치가 있다."
―그 많은 가치 중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장인 정신’. 에르메스의 기본 가치다. 개인적으로는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좋아한다. ‘자유’ 또한 필수적 가치다.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종종 혼나기도 한다.(웃음) 변화와 창작의 자유도 제가 중시하는 가치다. 에르메스에서는 창작이 모든 것의 중심에 놓여 있다. 에르메스에는 마케팅 부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에게 큰 자유가 주어진다. (에르메스 6대손이기도 한) 피에르-알렉시 뒤마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는 임원진이기도 하다, 미학적인 면에서의 단순함 역시 우리의 중요한 가치다. 단순함은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와 회사 경영에서도 핵심적인 가치다. 이 밖에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에 새기고자 하는 가치는 바로 ‘겸손함’이다.”
―직원들의 회사 충성도도 높고, 파트너십 기간도 평균 20년 이상이라고 한다. ‘평생직장’ 개념이 희박해지는 시대에 비결은?
“해외 출장을 가면 그 국가의 이직률을 확인한다. 해당 국가에서 에르메스의 이직률이 그 국가의 평균 이직률보다 낮기를 희망한다. 이직률이란 올바른 경영의 지표이고, 좋은 회사라면 직원들이 계속해서 머물기를 원할 테니 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직급에 관계없이 에르메스에서 존중받는다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장에 근무하는 판매 직원분들이 존중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객이 유일하게 대면하는 에르메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장인 또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존중받아야 한다. 장인 한 명이 가방 하나를 온전히 완성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분업화와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한다면 생산성은 분명 향상될 것이다. 그렇지만 장인들에 대한 존중과 그분들이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만든 내 가방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부심을 고취하기엔 지금 저희의 방식이 알맞다.”
―채용에 대한 철학도 남다를 것 같다.
“일을 통해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 다니다 다른 곳으로 이직할 마음을 가진 용병들과 함께할 순 없다. 샤를 페기라는 작가의 소설을 예로 들겠다. 세 명의 석공에게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묻는 장면이 있다. 석공 한 명은 ‘돌을 깨고 있다’ 답하고, 두 번째는 ‘밥벌이 중’이라 답하는 반면, 세 번째 석공은 ‘대성당을 짓는 중이다’라 말한다. 세 명 모두 같은 일을 수행 중이지만, 그 누구라도 세 번째 석공처럼 생각하는 직원을 채용하고 싶을 것이다.”
―계속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내가 좋아하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리 회사의 이름인 에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 신을 프랑스어식으로 발음한 이름이다. 헤르메스는 지혜와 장인 정신을 수호하는 신인 오디세우스에게 도움을 준다. 오디세우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존재다. 귀환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오디세우스에게 요정 칼립소가 신이 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라고 말하지만, 그는 꿋꿋이 여정을 이어 나가며 이타카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킨다. 오디세우스의 행동은 성공에 취해 타락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잘못된 방식으로 성공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방식으로 해서 실패하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오늘 인터뷰 중에 꼭 드리고 싶었던 말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