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도 미우미우도 ‘텍스트 힙’
지난해부터 ‘텍스트 힙’(독서가 멋지고 남달라 보인다고 여기는 것) 트렌드가 디지털 세대를 강타했다지만, 패션계에선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에서 영감을 받는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선보이는 의상의 출발점을 문학 속에서 찾곤 한다.
독서광이자 지난 5월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된 디자이너 피에로 파올로 피치올리의 경우 지난해까지 발렌티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는 동안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꺼낸 인물로 꼽힌다. 2022년 선보인 ‘내러티브 캠페인’에선 국내 정세랑 작가를 비롯해 전 세계 17명 유망 작가 작품 중 문장 일부를 캠페인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꾸준히 전 세계 독립 서점을 선발해 후원하고 협업해오면서 지난해엔 전 세계 주목해야 할 독립 서점 열 곳 중 서울 마포구의 독립 서점인 당인리책발전소와 김소영 대표를 선정해 촬영과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지난해부터 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인터내셔날 부커상을 후원하고 있다. 디자이너 조셉 알투자라는 쇼 관객 좌석에 자신에게 영감을 준 책을 두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번 25FW시즌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책과 함께 디자인에 영감을 준 진주 목걸이, 키스 마크 등의 이미지를 보자기에 포장해주기도 했다.
이번 시즌부터 디올의 남·녀·쿠튀르까지 모두 총괄하게 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 역시 책과 신문을 손에서 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디올로 옮기기 이전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당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아침마다 신문을 잃고, 주말판 신문을 따로 사서 보기도 하며 일주일에 책 스무권 정도를 사서 읽는다고 밝혔다.
그는 신문과 문학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 “세상의 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또, 특정 시대에 사람들이 왜 특정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위해 읽는다”고 설명했다. 지정학적인 상황으로 패션에 특정 주제를 다루는 것이 적절치 못할 경우도 있는 등 세상의 모든 일이 패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샤넬은 지난 2021년부터 그레이스 켈리의 손녀이자 모나코 왕실 일원이며 샤넬 하우스 앰버서더인 샬롯 카시라기가 기획하고 주최하는 ‘캉봉가 문학 모임(the Literary Rendezvous at Rue Cambon)’을 선보이고 있다. 평생에 걸쳐 작가·시인·문인들과 함께했던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헌사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세심하게 선별해 추천하고, 또 작가와의 대화를 선보이는 한편, 샤넬의 유튜브·팟캐스트 등을 통해 유명인들이 추천하는 책과 그 이유 등을 독자에게 알리고 있다.

그녀의 ‘이번 여름 독서 목록(summer readings)’에 오른 책들을 보면 우선 이디스 워튼의 기쁨의 집(1905). 20세기 초 뉴욕 상류사회에 대해 뛰어난 묘사와 함께 결혼과 사회적 이동성을 주제로 한 이책은 초기 미국 문학의 초석으로 여겨진다.

클레어-루이즈 베넷의 ‘체크아웃 19(2022)’는 이름 없는 화자가 학생 시절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며 일했던 곳으로 자전 소설의 요소를 띄면서 타인의 시선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독서의 변혁적 힘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가져온다. 그 외에도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뛰어나고 심오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일본계 미국인 작가 케이티 기타무라의 ‘Intimacies(친밀한 사이·2021)’, 올해 아동문학계의 노벨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 수상자인 마리옹 브뤼네의 ‘심판의 여름(Summer of Reckoning·2020)’ 등이 올라있다.

‘텍스트 힙’의 결정판이라면 아마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지난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통해 ‘문학클럽’을 발표 이후 ‘미우미우’ 브랜드를 통해 ‘미우미우 서머 리즈(Miu Miu Summer Reads)’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엔 밀란, 파리, 런던, 뉴욕, 서울, 상하이, 홍콩, 도쿄 등 8개 도시에서 올해는 베이징, 홍콩, 밀라노, 오사카, 파리의 상징적인 공간에서 일종의 ‘간이 서점’을 열고 프라다 여사가 선정한 책을 무료로 나눠줬다. 올해의 경우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자들(The Inseparables)’과 일본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엔치 후미코의 ‘기다림의 세월(The Waiting Years)’과 함께 특별 제작한 커버와 북마크 등을 증정했다. 책을 받기 위해, 또 함께 책을 읽기 위해 줄을 선 풍경은 그야말로 ‘텍스트’ ‘힙’ 그 자체였다.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이미 지독한 독서광이자 무료 뉴스 레터로 열혈 팬들을 모으는 가수 두아 리파는 지난 2022년부터 자신의 문화 플랫폼 ‘서비스 95’를 통해 독서 목록을 추천하고 작가와의 대화를 여는 등 북클럽에 적극적이다. 그녀는 2023년 이민진의 파친코를 추천하면서 이민진 작가와 직접 ‘작가와의 대화’를 나누는 등 다각도로 조명하기도 했다.


“책 속에서 자랐다”고 밝히는 모델 카이아 거버도 자신의 친구와 함께 지난해 ‘라이브러리 사이언스’ 사이트를 열어 젊고 새로운 목소리들과 현대 고전들을 조명한다.
보그 비즈니스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 프란체스카 그라나타 교수의 입을 빌어 “끊임없는 이미지로 넘쳐나는 시대에 패션은 지적인 감각을 되찾거나, 최소한 받아들이기 위해 글쓰기에 기대고 있다”면서 “문학이 지닌 느리고 신중한 리듬에 대한 갈망과 함께 삶에서 광적인 속도를 늦추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의 욕구 또한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