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작품도 도전하듯 한땀 한땀… 그것이 ‘메이드 인 이탈리아’ 정신
입력 2025.06.20 00:30

‘이탈리안 핸즈’ 출간한 디에고 델라 발레 ‘토즈 그룹’ 회장

“이탈리아에서 말하는 장인 정신(craftsmanship)은 단순히 이탈리아에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정교하고 숙련된 수공예와 그를 완성하는 손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장인 정신은 태도이며 삶의 철학입니다. 매우 강력하고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통해 축적되는 힘이기도 합니다.”
최대 35개의 레더 조각들로 이루어진 고미노 슈즈의 레더를 직접 손바느질로 이어 꿰매는 장인의 모습. /토즈 그룹 제공

최근 한국을 찾은 이탈리안 럭셔리 패션 토즈(Tod’s) 그룹의 디에고 델라 발레(72) 회장은 최근 토즈에서 펴낸 책 ‘이탈리안 핸즈’(Italian Hands)를 바라보며 말했다. 1900년대 초반 그의 할아버지인 필리포 델라 발레가 이탈리아 중부 작은 도시 마르케 지역에서 구두 수선 공방을 열며 토즈 그룹의 토대를 세우기 위한 단단한 박음질을 했던 그 시절을 잠시 화상하는 듯, “할아버지의 망치질 소리와 가죽을 다뤘던 방식이 지금도 토즈 직원들과 공명하는 것 같다”고 살짝 웃었다. 할아버지의 근면함과 장인 정신을 뼛속부터 이어받은 그는 그룹을 대표하는 토즈를 비롯해 호간, 로저 비비에, 페이(Fay) 등 브랜드를 보유한 글로벌 패션 회사이자 매출 약1조8000억원(11억 3000만 유로·2023년 기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가 선보인 ‘이탈리안 핸즈’는 팔기 위한 책이 아니다. 토즈 그룹의 뿌리이자 기반인 ‘메이드 인 이탈리아’ 정신을 1970년대 말부터 토즈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고미노 슈즈를 통해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비 삼아 펴냈다. 토즈를 대표하는 고미노 슈즈의 가죽 바닥을 망치와 못질로 구멍을 일일이 뚫는 장면과 손바느질로 가죽끼리 이어 꿰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곧 석고 조각가, 플로리스트, 도자기 아티스트, 무라노 유리 공예가, 금박 공예가, 페스토(이탈리안 소스) 메이커, 앤초비(멸치) 메이커, 테일러(재단사), 청동 조각가, 가죽 공예가, 밀짚 공예가 등 이탈리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인 예술로 변모시킨 장인이자 아티스트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이탈리아 석고 조각가 장인 로베르토 치티(Roberto Chiti)의 작업중인 모습. /토즈 그룹 제공

장인의 손으로 직접 품질을 확인 하며 레더를 컷팅 하고 있는 모습. /토즈 그룹 제공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 지원(2010~)·콜로세움 복구비 지원(2011~) 등에 이어 지난해 밀라노 마리노 궁전 복원을 위한 자금 지원 등 문화 유산을 지켜내는 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보존해야 할 것으로 장인 정신을 꼽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이탈리아의 로마, 피렌체, 베니스 등 같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작은 지역에도 놀라운 문화적 삶의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은 고대부터 전해오는 독특한 이탈리아만의 기술력으로 다른 어느 나라와도 구별되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장인들이 자신이 터득하고 창의를 발휘하는 능력을 즐기고 감사하는 삶에 대한 태도를 지녔다는 데서 더 빛난다. 좋은 신호라면, 최근 젊은 세대가 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장인 정신을 비롯해 옛것을 보존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이탈리아는 점점 부흥하고 젊어지는 것 같다. 매번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는 느낌이다.”
토즈(Tod’s) 그룹의 디에고 델라 발레 회장. /토즈 그룹 제공

토즈 그룹은 지난 1998년 디에고 회장이 태어난 마르케 지역에 약 17만㎡ 규모 건물과 6만4700㎡(16에이커) 규모의 정원을 갖춘 토즈 본사이자 공방을 열었다. 내부 3437㎡ 규모의 가죽 공방에선 완벽한 온도와 습도 조절로 가죽을 50년 이상 보관할 수 있는 저장고를 완비했다. 럭셔리 그 이상의 ‘품질’을 최우선으로 내거는 원칙 때문이다. 직원 복지를 위해 대규모 탁아소 및 유치원, 체육관, 레스토랑, 전시와 강연을 위한 강당 등 모든 시설이 무료로 제공된다.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론 아라드의 작품과 자동차 경주 스타 마이클 슈마허가 1997년 리그 챔피언십에서 몰았던 페라리 F33 ‘포뮬러 1’ 경주용 차도 전시돼 있다. 겉으로 보면 요즘 실리콘 밸리의 풍경과 비슷해 보인다. 그는 여기에 더해 지난 2012년 일종의 장인 전문학교인 ‘보테가 데이 메스티에리(Bottega dei Mestieri)’를 열었다. 가죽 등 각 분야 전문 장인들이 젊은 지원자들에게 전문 비법을 전수한다. 최소 6개월을 기본으로 여러 장인에게 기술을 전수받는 일종의 인턴십이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300명 가까운 젊은 장인이 탄생했다.
―장인들이 대대로 전수받은 기술을 보유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정말 존경하지만, 과정 자체가 고된 육체노동이다.
“‘보테가 데이 메스티에리’를 통해 배출한 젊은 장인 중에는 법대 학위를 받고도 지원한 이도 있다. 삶을 대하는 시각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만끽할 수도 있고, 자신만의 삶을 즐길 충분한 여가도 주어진다. 인간적인 생활 방식으로 삶에 균형감을 지니는 것이다. 또 그동안 우리의 제품을 전 세계 유명인들이 착용해준 덕에, 젊은 직원들은 자신의 손길이 들어간 제품이 전 세계에 널리 퍼지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더 큰 꿈을 꾸고,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낀다. 젠지(Gen-Z) 같이 요즘 젊은이들에겐 ‘장인’이라는 단어가 지루한 것이 아닌, 섹시한 찬사로 변하는 것 같다. 최고의 제품을 선보이려는 그들의 묵묵한 열정이 ‘토즈에서 일한다’는 것을 최상의 칭찬으로 만들어놓은 셈이다.”
‘인공 지능’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유명 브랜드들이 앞다퉈 말하는 ‘장인 지식’(Artisanal Intelligence)에 대해 이미 십수 년 전부터 강조해왔던 디에고 델라 발레 회장은 최근 이탈리아 국립패션협회가 주최한 ‘제3회 럭셔리 패션 체인지메이커’ 시상식에서 ‘장인정신 체인지메이커’ 상을 받기도 했다.
고미노는 100개이상의 제작 단계를 통해 완성되는데, 그 모든 과정은 토즈 팩토리 장인들의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133개의 러버 페블로 완성된 고미노 슈즈는 높은 수준의 기술력과 장인정신으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장인정신의 산물이다. /토즈 그룹 제공

―이미 많은 럭셔리 브랜드가 장인 정신을 내세우곤 한다. 토즈의 장인 정신은 무엇이 다른가.
“선망하는 삶의 방식을 마케팅으로든 뭐든 널리 알리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것이 진짜냐, 진실이냐, 그 차이다. 진정성을 결여한 마케팅이라면 그들의 외침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는 마케팅을 우선시하는 다른 많은 브랜드와 우리를 구분한다. 우리에게 마케팅이란 가방이나 신발, 재킷 뒤의 이야기, 즉 제작 과정과 우리가 ‘진짜’로 진정성 있게 하는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품질을 지키고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큰 투자는 바로 사람에 있다. 제품의 가치 뒤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진짜 장인 정신이다. 이탈리아에선 자국 내 제작된 제품에 대한 관리 감독이 수십년 간 이뤄져 왔고, 그간의 보고서를 보면 우리는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러한 진정성 있는 장인 정신의 실천을 지속적으로 이루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살면서 만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은?
“너무 많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기억해보자면 엄마와 아빠의 손일 것 같다. 할아버지가 키운 토대를 바탕으로 아버지(도리노 델라 발레)는 1940년대 토즈 회사를 만드셨다. 두 분 다 너무나 인간적이시면서도 ‘품질’ ‘일관성’에 절대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분이시기도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남은 가죽으로 한땀 한땀 이어 침대를 만들어주셨다. 그 손길이 나를 건강하게 키웠다. 학창 시절 쉬는 날에는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돕기도 했는데, 그곳은 나의 놀이터이자 곧 배움터였다. 2012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회사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며 직원들을 돌보시던 아버지가 아직도 곁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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