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구찌(Gucci)가 ‘뱀부‘의 유산을 조명하는 전시, ‘Gucci | Bamboo Encounters’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8일부터 13일까지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맞춰, 16세기 건축 유산인 이탈리아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San Simpliciano) 회랑에서 개최된다. 한국의 이시산 작가를 포함한 전 세계 7인의 아티스트들이 ‘뱀부(대나무)‘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Gucci | Bamboo Encounters’ 전시는 1940년대 중반, 구찌가 핸드백 손잡이에 처음 대나무 소재를 적용하며 구찌 뱀부 1947 핸드백을 선보였던 혁신적인 장인 정신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뱀부‘는 구찌를 대표하는 코드로 자리 잡았으며, 단순한 디자인 요소를 넘어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역할과 의미를 지니며 고유한 여정을 이어왔다. 나아가 예술, 문화, 디자인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된 이시산 작가(30)를 서면으로 만났다. 이 작가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이자 예술가로, 인테리어 디자인, 가구, 조각을 중심으로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실내디자인학을 전공한 그는 규격화된 산업 생산 방식과 대비되는 자연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매료돼, 자연성과 인공성의 경계, 원시성과 현대성의 균형을 탐구해 왔다.


그중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과 가공된 스테인리스스틸을 사용한 ‘무위(無爲)’ 시리즈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다.
도시와 자연 환경에서 수집한 돌, 나무, 금속 등을 작업에 사용하며, 이 재료들이 지닌 순수성을 보존하면서도 이를 디자인에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특징이다. 재료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산업 제품과는 뚜렷이 구별되며, 소재 본연의 특성과 그것에 대한 깊은 존중을 반영한다.
-이번 전시회 참가 제안을 언제 받았나요? 그때 기분은요?
“올해 초, 세계적인 브랜드 구찌와 함께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전 세계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것에 큰 책임감을 느꼈지만, 구찌 브랜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대나무라는 소재를 탐구하고, 이를 저만의 시각으로 표현해 나가는 과정은 매우 즐거웠습니다.”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이전 작품들 중에서 특별히 주목받았거나 했던 점이 있다면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저의 창작 과정은 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업적 요소와 자연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와도 잘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작업 중 NEO PRIMITIVE라는 작품은 가지치기 후 버려진 나뭇가지를 수집해, 성질이 상반되는 산업 재료인 알루미늄으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이 시리즈에 사용된 알루미늄 주조 기법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 중 하나는 높이 1.8m, 무게 380kg에 달하는 선반인데, 워낙 무거워서 함께 옮기는 데 많은 인원이 고생을 했습니다. 다음에는 작업을 구상할 때 반드시 무게도 함께 고려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자연 재료와 산업 재료, 특히 인공성(강철·스틸)의 조화를 탐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나무(뱀부)라는 주제를 접했을 때 첫인상은 어땠나요? 이 개념이 빨리 떠오르셨나요?
“저는 대나무라는 소재를 어떻게 제 시선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처음에는 바람에 흔들릴 때 소리를 내는 풍경 같은 구조물을 구상했지만, 구현 단계에서 많은 문제에 부딪혀 결국 그 아이디어는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숙고 끝에, 한국 디자이너로서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제게 대나무는 개인적으로 수묵화 속 이미지나, 대나무 문양이 담긴 백자의 간결하고 우아한 디자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적인 미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비움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공간 속에서 대나무 자체가 부각되도록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자연과 산업 소재 간의 조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으며, 이번 작업에서도 그 연장선상에서 접근했습니다. 모래 주조 기법을 활용해 대나무 고유의 자연스러운 선을 살리는 동시에, 알루미늄 특유의 질감을 보존해 유기적인 감성과 산업적인 감각 사이의 균형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대나무는 소재로서 매우 명확하고 알아볼 수 있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어떻게 재해석했나요?
“대나무의 형태를 직접 조각하는 대신, 알루미늄 표면에 대나무 문양을 새기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음각과 양각 기법을 병행해 알루미늄 덩어리 위에 대나무를 새겨 넣었고, 이를 통해 빛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입체감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넓은 공간 속에 새겨진 대나무의 깊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차원이 다른 감각을 느끼게 하며, 작품의 밀도를 더해줍니다. 문양이 새겨진 부분은 매끄럽게 광을 내고, 그 외의 면은 거칠게 마감하여 하나의 재료 안에서도 강한 대비를 주었습니다. 이 같은 방식을 통해 대나무가 지닌 상징성을 유지하면서도, 저만의 조각적 해석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 요소와 산업 재료를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미감을 현대적인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작품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 여러 번 시도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나요, 아니면 장인처럼 손으로 작업하는 데 드는 육체적 부담과 어려움이 여정의 일부가 됐다거나 하는 점이랄까요.
“전체 작업은 구상부터 완성까지 약 두 달이 걸렸습니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과정은 알루미늄을 주조하기 위한 원형 몰드를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몰드는 최종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특히 대나무 문양을 양각과 음각 기법으로 몰드에 새겨 넣는 작업이 까다로웠습니다. 대나무는 두께와 곡률이 일정하지 않은 소재라 아주 작은 차이에도 전체적인 인상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세심하고 정밀하게 작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알루미늄 주조 과정도 생각만큼 순탄하지 않아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던 만큼, 최종 결과물은 더욱 값지고 보람 있게 다가왔습니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대나무는 실험과 시대를 초월한 소재이자 상징입니다. 작품의 맥락에서 ‘시대를 초월한‘(timeless)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에게 ‘Timeless’란, 시간을 초월하는 내재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구찌의 헤리티지와 대나무가 지닌 상징성을 현대적인 조형 언어로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자연은 시간이 흐르며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금속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는 영속성을 지닌 소재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반된 두 요소를 결합함으로써, 구찌의 유산을 보존함과 동시에 시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대나무는 곧고 우아한 자태로 전통 문화에서 군자의 미덕과 강직함을 상징해 왔습니다. 구찌는 뱀부 1947에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러한 특성을 재해석한 반면, 작가님의 작품은 자연 소재의 원형을 보존하고 요소 간의 대비를 조화시키는 등 한국 전통 건축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가지 접근 방식은 비슷해 보이지만 보존과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대나무의 선형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을 강조한 최근 작품에서 창작 과정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자연 소재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보존하면서, 이를 산업적 요소와 조화시키는 방식을 추구합니다. 대나무의 본질은 곧고 직선적인 아름다움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특성을 반복적인 패턴을 통해 강조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대나무의 선형미가 구성 안에서 도드라질 수 있도록 굵기와 각도를 세심하게 조정해가며 배치했고, 주변의 ‘비워진 공간’ 안에서 그 형태가 더욱 돋보이도록 설계했습니다.
또한, 음각과 양각 기법을 병행해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입체감을 통해 깊이를 부여하고, 대나무가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다 다층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자연과 인공의 균형이라는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든지….
“자연과 인공 사이의 균형에 대한 저의 탐구는 개인적인 경험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도시 환경에서 살아온 저는,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충주에서 공부하던 시절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마주한 자연의 본연의 아름다움은,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며 익힌 구조적이고 계산적인 방식과는 뚜렷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인공적인 창작물이 정해진 규칙과 정확한 계산을 따르는 것과 달리, 자연은 형언하기 어려운 유기적이고 비정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자연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면서도 산업 재료와 조화롭게 결합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습니다.
저는 작업을 통해 자연과 인공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단순히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관계를 맺으며 보다 근원적이고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이나 나무와 같은 천연 소재를 선택할 때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과 안목을 지니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미리 재료를 수집하나요, 아니면 각 프로젝트의 필요에 따라 특정 요소를 찾나요?
“자연 소재를 선택할 때 저는 그 고유의 형태와 질감, 그리고 감각적으로 전달되는 특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 석재 채석장에서 의도적으로 재료를 찾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소재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캠핑을 하던 중 돌을 줍거나,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아버지 댁에서 자연스럽게 가지치기된 나뭇가지를 모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마치 제가 재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료가 저를 찾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이전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과수원에서 영감을 받아 자연스러운 나무 형태의 주물 뜨는 방식을 선보이게 됐다는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 사용할 대나무 형태 혹은 형상은 어디서 발견했나요?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경상북도 경산에서 대나무를 공수해 사용했으며, 다양한 두께감을 표현하기 위해 신죽(어린 대나무)과 구죽(성숙한 대나무)을 함께 선택했습니다. 구죽은 더 두껍고 단단한 반면, 신죽은 얇고 섬세한 질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대나무는 자연적으로 마디 간격이 뿌리 쪽에서는 조밀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넓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저는 이러한 마디의 변화를 활용해 대나무가 지닌 다양한 표정과 생동감을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나무라는 소재의 풍부한 형태미를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스틸(강철)은 종종 로봇이나 심장이 없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나무꾼처럼 차갑고 기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강철로 작업하면서 따뜻함이나 뜨거운 인간미를 느낀 적이 있나요? 양철 나무꾼에게 심장을 달아준 것처럼요.
“스틸은 일반적으로 차갑고 기계적인 소재로 인식되지만, 저는 자연의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 작업에서 스틸은 단순히 구조적인 역할을 넘어, 돌이나 나무 같은 자연 소재와 조화를 이루며 유기적인 감성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오히려 스틸이 지닌 차가움이 역설적으로 따뜻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또한 스틸은 오차 없이 정밀하게 생산되는, 매우 계산적인 특성을 지닌 소재입니다. 작업을 하다 보면 이러한 특성이 때때로 제 자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자연의 우연성과 스틸이 가진 구조적 정밀함 사이의 균형을 탐색하며, 이 두 요소가 충돌이 아닌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고자 합니다.”


-작가님만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즉,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형태는 무엇인가요?
“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자연이 지닌 고유한 질서와 그것이 산업적 요소와 조화를 이루는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자연은 완벽한 대칭을 따르지는 않지만, 겉보기의 무질서 속에도 나름의 질서와 균형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러한 자연의 특성을 작업 안에 담아내고, 동시에 산업 소재를 결합해 조화로운 균형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서로 다른 재료와 요소들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며 함께 확장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상반되는 힘들이 맞닿아 자연스럽게 서로를 보완하는 그 순간, 저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맞춰 선보인 이번 전시는 이러한 풍부한 유산을 바탕으로, ‘뱀부‘라는 소재가 지닌 영향력과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온 방식을 조명한다. 스튜디오 2050+와 창립자 이폴리토 페스텔리니 라파렐리가 큐레이팅 및 공간 디자인을 맡은 이번 전시에는 전 세계 유망한 아티스트 7인도 참여했다. 그중 한국 작가 이시산은 한국의 미학과 현대적인 기법을 결합해, 알루미늄 재료를 활용해 ‘뱀부‘의 자연적인 특성을 구현했다. 이 외에도 전 세계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레진, 유리, 실크 등 각기 다른 재료를 활용해 ‘뱀부‘라는 소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풀어낸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와 더불어, 8일부터 10일까지 전시에 참여한 디자이너 등과 함께하는 특별 토크 세션을 진행한다. 전시 및 토크 세션은 사전 예약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