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테가 베네타가 후원한 리움미술관의 전시 ‘리미널’
처음엔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현재 가장 촉망받는 현대 미술가 중 하나인 피에르 위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 이런 ‘문제적 작가’의 작품을 관람할 때는 대체로 사전 정보를 줄이고, 작품을 처음 마주할 때 뿜어내는 기운을 마주하고, 작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머리로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자주 듣곤 한다. 하지만 그 명성은 자꾸 그에 대한 정보를 더 찾게 했다. 그의 이번 전시 전체의 작품명이자 동명의 작품이기도 한 리미널(Liminal). ‘생각지도 못한 무언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눌러보니, 고생대부터 미래적인 느낌까지의 사진들이 주르륵 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의 연속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
27일부터 오는 7월 6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 미술관 블랙박스와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피에르 위그의 개인전 ‘리미널’에 진입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 더 했다. 1962년 프랑스 파리 출생의 피에르 위그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작업하며, 현대미술의 고정된 형식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탐구해 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
새까만 입구부터 펼쳐진 검은 방은 때론 두려움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중도를 최고 수준으로 높여 모든 감각을 열어놓게 한다. 작은 소리에도 더 민감해진다. 외신으로 접한 사진과 영상으로는 현장에서의 감정을 담아낼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피에르 위그에게 전시 공간은 그 자체로 전시를 완성하는 거대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 눈을 깜빡이든, 감탄사를 내뱉든, 사각사각 발자국 소리를 내든 그 모든 것이 정보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수집하고, 학습하며, 변화하고, 진화하며, 인공적인 주관성이 서식하는 새로운 형태를 제시해냈다. 피에르 위그는 자신의 작품을 가리켜 ‘사변적 허구’라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미술관 안에 설치된 개별 센서들을 통해 주변 정보를 수집하고, AI 첨단 기술을 활용해 이를 해석하고 실시간으로 양태를 변화시킨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실상 누구도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존재자가 그 존재를 믿을 뿐.

대표적인 작품이 그의 최근작 ‘리미널’(2024~)이다. 얼굴 부분이 뻥 뚫려 검게 보이는 형상의 벌거벗은 남녀가 등장하는데, 얼굴 부분이 뚫렸다는 건 뇌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비인간적인 존재지만 관람자인 인간을 통한 자극을 수집하고, 행동도 조금씩 바뀐다. 그날 본 작품이 그 다음날 본 작품과 비슷한 듯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미술관이란 고정된 공간에서, 작품이라는 고착화된 틀 안에서 분명 생명체는 아니지만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마치 영원성을 부여받는 듯 하다. 최근 많은 현대작가 작품들이 인류 멸망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근미래에 관한 의제를 많이 내던졌다면, 그는 금색 LED 마스크로 된 ‘이디엄’(Idiom·2024~)을 통해 인간의 언어를 통해 새롭게 조합된 또 다른 언어의 탄생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를 제시한다. 이 알수 없는 생성형 언어의 존재들은, 역시 인간의 발성 기관을 통해 특정한 구문과 음소로 변환된 것으로 무척이나 비인간적이지만 그 변화의 중심에는 인간성이 유효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보테가 베네타, 위그 전시 후원 통해 리움미술관과 파트너십 지속
리움미술관 부관장 겸 수석 큐레이터인 김성원과 피에르 위그 스튜디오의 큐레이터인 앤 스테네의 긴밀한 협업으로 탄생한 이번 전시는 신작 ‘리미널’ ‘이디엄’ ‘카마타’(2024~)와 대표작 ‘휴먼 마스크’(2014) ‘오프스프링’(2018), 수족관 시리즈 등 총 12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작품들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시각적으로 전환한다. 특히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가 후원한 전시로, 지난해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에서 열린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 전시 후원에 이어 지속된 것이다. 보테가 베네타와 리움 미술관의 두번째 파트너십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신작 중 하나인 ‘이디엄’ 의상은 보테가 베네타와 작가가 협업해 선보였다.
보테가 베네타가 공예를 비롯한 각종 공방 후원 등 장인 정신을 높이 사는가 하면, 음악, 무용, 건축, 시각 예술, 인쇄 출판 등을 포함한 다방면에서 적극적인 문화 후원 활동을 보인 건 익히 알려진 사례. 그에 앞서 아티스트에 근본적인 영감을 주는 현대 미술가 등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후원하며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각인하는 계기도 됐다. 럭셔리 브랜드라면 한번 쯤은 현대 미술가와 협업하거나 현대 아티스트를 후원하곤 하지만, 세계적 명성의 리움 미술관과 협업 관계를 이어가면서 작가를 후원한다는 건 지금껏 여느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행보다.
보테가 베네타가 자신의 로고를 드러내지 않고도 베네토 지역의 장인 정신을 앞세워 작업 기법 등 제품력을 인정 받았듯, 보테가 베네타 제품 속에 녹아있는 현대 미술에 대한 깊은 경의와 이해도는 미술계는 물론 대중을 설득하기 모자람 없어 보인다.
피에르 위그의 작품을 보면서 보테가 베네타의 런웨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보테가 베네타의 쇼를 볼 때도 항상 심호흡이 필요하다. 어떤 놀라움이 또 두 눈을, 심장을, 뇌를 회전시킬 지 모르니 말이다. 보테가 베네타가 “착용자가 느끼는 사적인 즐거움의 ‘조용한 힘’”을 강조했던 건, 피에르 위그의 신경망처럼 상호작용해 진화하는 걸 염두한 듯 하다.
보테가 베네타는 인체의 움직임을 통한 역동성에서 영감받은 작품을 선보이면서 착용자의 행동에 따라 마치 새로 새기는 조각 같은 조형미의 작품을 여럿 선보였다. ‘오디세이(Odyssey·경험이 가득한 긴 여행)’를 테마로 내세우면서 외적이면서 내적이고, 실재하는 동시에 상상할 수 있는 변화와 탈출의 여정을 상정하기도 했다. 상상 속 다양한 지도를 그려보는 것도, 출퇴근 길도 광범위한 의미에서 모두 여행이다. 런웨이 공간 역시 장소적 발견 그 이상으로, 작품의 연장선상 역할을 했다. 마치 피에르 위그가 리움 미술관을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환경으로 설계해 놓았듯, 보테가 베네타 역시 사람, 움직임, 동선, 역동성 같은 것들이 모였다 다시 해체해 돌아가는 모습까지 고려해 공간을 구성했다. 청바지로 보였지만 실제론 가죽으로 만든 제품 등 ‘입는 테크웨어’까지는 아니었지만 천재적 발상과 각종 테크놀러지와 장인정신의 결합, 즉 인간과 비인간성(첨단 기계)이 조합한 역작을 선보였다. 지속적으로 학습하는 첨단 기술과 진화하는 생성형 AI가 인간적인 창의성을 만나 어디까지 극대화할 수 있을 지 보테가 베네타는 브랜드 스스로를 통해, 또 이번 피에르 위그 전시회를 통해 관람자에게 또 다른 기대와 설렘을 남기게 했다. 입장료 1만6000원.
보테가 베네타의 문화 후원 핵심 가치… 탁월함·혁신적인 장인정신·공동체 정신
보테가 베네타에 예술이란 태생부터 뿌리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테가 베네타 측은 “2년 연속 서울 리움 미술관과 파트너십을 맺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서 “보테가 베네타는 탁월함, 혁신적인 장인정신 그리고 공동체 정신에 대한 헌신을 공유하는 창의적인 작업을 추구하며 지지해왔다”고 밝혔다. 다음은 대표적인 문화 후원 활동.
▶보테가 포 보테가스 캠페인 (2021년~2024년)
1966년 이탈리아 비첸차의 장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는 ‘베네치아 장인들의 공방(Bottega·이탈리아 전통 공방)’이라는 뜻이 있다. 매년 말 주제에 맞는 장인들의 공방을 선정하는 데, 지난 2023년엔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며 ‘함께’라는 의식을 고취한 공방 중 하나로 국내 전통 방패연 공방인 ‘리기태 명장’이 선정된 바 있다.
▶베네치아 댄스 비엔날레 프로젝트 (2021년~2023년)
베니스(이탈리아어로 베네치아)는 보테가 베네타가 탄생한 베네토 지역의 주도(州都)로, 브랜드가 첫 매장을 연 곳이자 브랜드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다차원적인 시도로 주목받는 보테가 베네타는 2021년 시작한 ‘베네치아 댄스 비엔날레 프로젝트’를 2023년까지 3년째 후원하며, 전 세계 예술 관계자들을 사로잡았다. 퍼포먼스 의상은 보테가 베네타가 연출했다.
▶새로운 예술 잡지 ‘마그마(Magma)’, 보테가 베네타 지원으로 론칭(2023년)
▶이탈리아 테라포르마 뮤직 페스티벌의 ‘미로’ 무대 공동 큐레이션(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