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없는 시계 발표회… 시간을 조각하는 ‘에르메스 컷’ 방식
입력 2024.07.26 00:30 | 수정 2024.07.26 00:30

에르메스

그동안 수많은 시계 발표회를 다녀봤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신제품에 대해 전 세계에서 50명 남짓한 기자들을 선별해 특별하게 선보이는 자리.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그것이 없었다. 바로 시계였다.
어떤 행사를 가든, 시계를 보여주고, 착용하거나 착용해 보이거나, 아니면 모델들이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는 패션쇼 를 선보이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시계 출장에서 시계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이 없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지막 출장지를 향해 떠나기 직전까지 장소도, 내용도 모든 것이 ‘비밀’리에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그 의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끝나고 나선 현지 참가자들이 ‘그 시계’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에르메스가 선보인 신제품 시계 ‘에르메스 컷’이다. 물론 지난 4월초에 선보인 세계적인 시계 박람회인 워치스앤 원더스에서 신제품을 선보였기 때문에 시계 자체에 대한 설명을 삭제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에르메스 시계 CEO까지도 “왜 (발표 장소가) 이곳이었나 궁금했다”고 말하는 순간, 에르메스라는 회사가 단순히 팔기 위한 제품이 아닌 작품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에르메스 컷. 인하우스 무브먼트 H1912를 탑재한 기계식 시계로 그간 업계를 지배했던 기계식 여성 시계의 지위를 바꿔놓을 것이란 찬사를 이끌어냈다. 대표적인 여성 라인으로 꼽히지만, 36mm 사이즈는 남성들도 착용 가능하다. /에르메스 제공

에르메스가 사람들을 이끈 곳은 그리스 티노스 섬. 프랑스 파리를 통해 그리스까지 도착하는 비행편과 두 번의 배를 갈아타고 타고 도착했다. 각자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럽이 아닌 반대편 대륙에서 오는 이들은 30시간에서 40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에르메스 시계 로랑 도르데 CEO는 “먼 길”이지만 “천국에 가까운 환상적인 장소”라고 운을 뗐다. 과언이 아니다. 천국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도달했을 때, 그만한 가치가 있다.
티노스는 화산섬으로 섬 북부의 흰색과 녹색 대리석부터 남쪽의 슬레이트와 화강암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희귀한 광물과 돌로 이뤄진 곳이다. 돌밭이라 튼튼한 운동화를 신어도 걷기 불편하다는 말이 나오기 일쑤였고, 산악용 자동차가 아니고선 적지 않은 비포장 도로를 다니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차창 밖을 내다보면 고대부터 경작 가능한 땅을 만들기 위해 돌담을 깎고 쌓아 만든 언덕의 계단식 평원부터 도로의 모든 굴곡을 장식하는 화산암이나 바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천연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비교에서 생산되는 감정일 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감정이 일치하는 순간이 있겠지만, 극도로 힘든 순간에 우리는 어쩌면 천국같은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 아닐까.
대리석 채석장에서 태양빛을 받으며 에르메스 워크샵에 참여하는 이들의 모습.

에르메스는 우리를 바닷가에 직면한 채석장으로 데려왔다. 끝을 모르는 해안선의 짙푸른 빛과 에메랄드 색상의 바다는 채석장의 녹색과 검은색이 물결 친 대리석과 어우러지며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했다. 미지에 가까운 듯한 신비한 척박함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구하기 힘들고 쉽게 깎이지도 않아 기계의 힘을 빌려서 재단해야 하는 녹색 대리석 더미는 예술가들에게 관심과 흥미와 도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예술과 아름다움의 섬”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다.
이러한 곳과 시계가 과연 무슨 상관이 있을까. 에르메스 ‘컷’의 비전과 정의가 여기 있었다. 에르메스 컷은 원형 실루엣 속에서 기하학적 테마가 돋보이는 시계다. 원 속의 완벽한 원이라는 구조를 지닌 이 독특한 시계는 같은 원을 어떤 식으로 깎아 내느냐에 따라 날카롭지만 우아한 곡선을 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르메스는 그 작업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티노스라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시계에 대리석이 들어가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세공 기술로 하나씩 깎아내 날카롭지만 매끄러운 면을 드러내는 그 과정은 신이 우리에게 주는 자연이라는 선물에 비견할 만했다.
에르메스 컷을 음악적으로 해석한 곡을 선보인 티노스 섬의 대리석 채석장과 호수. 공연은 이탈리아 예술가 알레산드로 시아로니(Alessandro Sciarroni)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감상의 시간은 눈에서 귀로 전해졌다. 그 채석장에서 퍼지는 화음. 인간이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악기, 목소리가 만들어낸 화합이었다. 이탈리아 예술가 알레산드로 시아로니 등이 작곡한 ‘Shapes of Time(시간의 형상)’이란 노래로, ‘타임’이란 단어가 메아리쳤다. 합창단의 목소리는 로랑 도르데 CEO의 말처럼 천국의 신호처럼 들렸고, 시간이 멈춘 듯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동안 시계 초침과 분침은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느껴보라는 것 같기도 했다.
자연의 선물을 조각한 건 인간이다. 그리스 신화 속, 아니 그리스 현지에서 보이는 신전들도, 도심 한복판에 있는 현대식 건물들도 자연이 준 산물을 통해 인간이 조각해낸 것이다. 에르메스의 모든 영감은 자연에서 왔고, 인간의 장인 정신으로 또 하나의 테마로 탄생했다.
에르메스 시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필립 델로탈은 현지 아티스트와 함께 대리석을 조각하는 법을 알려줬다. 인간의 고된 노동은 작품을 만들어낸다. 쪼고, 긁고, 때리고, 나누고, 다듬고, 그런 과정을 통해 대리석은 또 다른 빛을 낸다. 에르메스는 시간을 측정하고, 명령하고,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시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우리가 시간을 어떤 식으로 누려야 하는 지 그 공간을 재창조하는 모습이었다.
에르메스 컷에 대한 설명을 직접적으로 전하지는 않았지만, 각 브랜드 현지 홍보 담당들이 에르메스 컷을 착용하면서 실제 착용 모습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줬다. 바다 위에서, 대리석 위에서, 동네 골목에서, 문틈에서, 또 나뭇잎과 꽃 사이에서 오렌지, 흰색, 연두(vert criquet) 등 8가지 스트랩 색상과 조화된 에르메스 컷을 바라보는 건 자연 속에 동화된 느낌마저 일으키는 또 다른 예술적 경험이었다.
4대째 이어온 대리석 장인 가문 출신 조르고스 C. 팔라마리스와 에르메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립 델로탈.

에르메스 컷이 등장한 배경 역시 자연에서 왔다. 필립 델로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스위스 제네바의 어느 산책길을 거닐다가 에르메스 컷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제네바의 자주 가는 호수 길을 따라 돌을 주우면서 그 컷과 모양에 감탄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의 형태감이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돌이란 건, 우리가 흔히 알 듯, 물과 바람 등의 작용으로 깎이고 깎여 바위에서 자갈이 되고 모래로 변하기도 한다. 화산 활동이나 각종 지각의 변동으로 인해 기괴 암석이 올라오기도 한다.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지층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자연에서 예술가들은 영감을 얻는다. 로랑 도르데의 이야기를 들은 에르메스 시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립 델로탈도 마찬가지였다. ‘컷’이라는 철학적 의미부터 찾아갔다. 자르고 다듬고 쪼고…. 완벽한 동그라미도 점과 직선으로 만들 수 있다. 이 기하학적 의미를 시계에 담아낸다. 수만, 수천만 시간의 자연이 돌 하나를 만들기 위해 들인 공을 인간이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시간의 공간감과 위대함을 다시 느낀다.
대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것이고 태양과 바다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순환의 질서를 만든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된다. 그 순간을 짚어낸 것이 에르메스 컷이다.
티노스 현장을 찾은 에르메스 창립자 티에리 에르메스의 증손자이자 에르메스의 아티스틱 디렉터인 피에르 알렉시스 뒤마는 에르메스 컷에 대해 설명하면서 “휴먼 터치”를 강조했다. 그는 “에르메스 컷은 인간의 손으로 무엇을 해낼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도 인간은 이를 잘라내고 세우고 붙여 또 다른 무언가를 창조한다.
말하자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도 인간 불굴의 의지로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본주의’를 시계를 통해 느낄 수 있다는 건 이곳에 오기 전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에르메스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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