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이 런웨이에 뜨자, NYT는 외쳤다… “이것은 인트레치아토 축제”
입력 2025.10.17 00:30

루이스 트로터 ‘보테가 베네타’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가죽 코트·스커트 전체가 인트레치아토… “과감한 시도”

샤이니 레더 올오버 인트레치아토 코트로 루이스 트로터가 하우스의 시그니처 위빙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룩.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쩌면, 행운아다. 세계 패션계의 대변혁이 이는 시점에서, 가장 촉망받는 디자이너 중 하나이자 미래가 더 기대되는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친숙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낯선, 때문에 대다수 패션 전문가들이 입 모아 “다음 작품을 더 빨리 보고 싶다”고 외치게 한 그녀. 보테가 베네타의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다.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

그녀가 지난 9월 27(현지시각) 이탈리아 밀라노에 선보인 보테가 베네타 2026여름 쇼는 단지 잠재력 충만한 디자이너의 거대 패션 그룹 데뷔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패션계의 명운을 좌우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가죽을 엮어 만드는 인트레치아토(Intrecciato) 기법의 정수(精髓)가 담긴 이탈리아 특유의 장인정신 브랜드의 명맥을 어떻게 잇고, 어떠한 평판을 받느냐에 따라 패션계 권력 구조와 함께 이탈리아 패션사(史)가 무너지느냐 재증축되느냐가 결정되는 한판이었다. 예상하듯이, 그녀가 쇼 막바지에 인사하기 위해 무대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현장에 참여한 이들은 물론 온라인으로 실시간 영상을 본 이들까지 이미 마음으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선보인 ‘조용한 럭셔리’는 ‘조용한 혁신’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서사적 럭셔리’를 창조하다
‘명징하게 직조하다’라는 문장만큼이나 이번 루이스 트로터의 작품을 적확하게 설명해내는 건 찾기 어려워 보인다. 말 그대로 브랜드의 유산인 인트레치아토를 가방, 구두 등뿐만 아니라 옷의 구조적 디테일로 확장했다. 트렌치코트 칼라부분이나 재킷 라펠과 소매 등에 섬세하게 적용된 것은 물론, 장식적인 요소로 등장한 신문마저도 인트레치아토로 구성됐을 정도다. 뉴욕타임스가 ‘인트레치아토 축제’(intrecciatopalooza·인트레치아토팔루자)라고 표현했듯, 페이턴트 가죽 코트나 스커트 전체가 인트레치아토로 돼 있는 등 전면적이고 과감한 시도도 돋보였다. 가죽은 물론, 코튼, 실크, 니트 등 다양한 소재에 위빙을 적용해 촉각적 깊이와 시각적 리듬을 창조했다.
인트레치아토의 소프트 펑셔널리티가 컬렉션 전반에 흐르며, 테일러링에서 비롯된 나파 가죽 트렌치코트부터 태슬, 러플, 퍼 같은 다채로운 디테일이 생동감을 더하며 보테가 베네타의 새로운 챕터를 연 2026 여름 컬렉션. /보테가 베네타 제공

장인들이 수천, 수만시간을 들여 만드는 작업을, 프랑스에서 흔히 ‘오트 쿠튀르(최고급 수제 맞춤)’라 불릴 만한 의상을 기성복 런웨이에 선보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이스 트로터는 자신의 디자인 감각뿐만 아니라 보테가 베네타의 장인 정신과 장인들의 역량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전진 배치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창조이자 혁신이다. 그녀의 결단은 분명 의도된 선택이자 영리한 실험이었다. 그녀의 이번 쇼 제품을 전 세계 매장에 본격 선보이는 내년은 보테가 베네타의 60주년이자, 이 쇼를 선보이는 올해는 인트레치아토 50주년. 쇼현장에 보테가 베네타의 역사를 함께 한 로렌 허튼을 비롯해, 줄리안 무어, 우마 서먼 등 전설적인 스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도 바로 그 이유다. 루이스 트로터는 ‘움직임’과 ‘착용자의 예술’을 극치로 끌어올린 전임자의 정신에 크게 반하지 않으면서 본질에 더 파고들었다. 가장 역사적인 순간에 선임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만큼 브랜드의 뿌리를 재확인하고, ‘지적인 장인정신’이라는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고급스러움을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그녀의 작품이 더 빛나는 건 ‘베네토 지역의 공방’ 이라는 뜻의 보테가 베네타의 본류를 주연으로 내세운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사전 인터뷰에서 “보테가 베네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진정한 워크숍”이라면서 “장인과 창의성이 함께 해결 방안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전면 인트레치아토 코트뿐만 아니라 장엄한 케이프는 4000시간 수작업을 들여 2mm 가죽 스트립을 직조한 작품이다. 장인들이 없었다면 루이스 트로터의 스케치는 현실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난관을 헤쳐나가는 여전사라 하더라도, 그녀의 상상을 ‘실제’이자 ‘실재’로 구현하는 ‘손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승리의 깃발을 꽂긴 어려웠을 것이다. ‘인간성’이라는 아름다운 서사(narrative)를 더해, 올해 선보인 인트레치아토 50주년 캠페인인 ‘Craft is our Language’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AI에 집착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수작업과 유산, 그리고 기묘한 인간의 상상력이 모두 함께 직조된 것이야말로 가장 큰 럭셔리일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미래로 가져갈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다.”
보테가 베네타의 2026년 썸머 컬렉션은 하우스의 시그니처인 ‘인트레치아토’를 보다 유연하고 다채롭게 풀어내며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제시한다. 하우스의 클래식한 디자인이였던 로렌, 놋, 그리고 까바의 변형에 이어 아카이브를 재해석해 현대적 미학과 보테가 베네타의 장인적 정체성을 결합한 다양한 사이즈의 ‘베네타’ 백이 돋보인다.

◇묵직하되 경쾌하다… 루이스 트로터식 유희
루이스 트로터라는 이름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녀가 디자인한 옷을 한번 쯤은 입어봤거나 적어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캘빈 클라인, 타미힐피거 등 미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에서 실용적인 디자인 감각을 익혔고, 조셉과 라코스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치며 미니멀리즘과 기능성에 기반한 정교한 테일러링, 그리고 스포티한 우아함을 선보인 주역이다. 또 프랑스의 카르뱅을 통해 절제된 관능미를 표출하는 능력도 십분 발휘했다.
실제 ‘삶’에 뿌리를 둔 디자인에 능한 루이스 트로터는 ‘조셉’에서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상당수 여성의 ‘유니폼’이자 직장인 ‘필수템’으로 꼽히게 한 1등 공신이다. 특히 ‘바쁘고 예민한 직장인’의 표상인 뉴요커에게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 중 하나이자 가격 대비 소장가치 있는 제품들로 각광받았다. 라코스테가 파리 패션위크에서 ‘패셔너블’한 브랜드로 인정받은 것도 그녀의 손을 거치고 난 뒤다. 여기에 보테가 베네타라는 브랜드 유산과 장인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한계와 경계 없이 역량을 펼칠 수밖에.
인트레치아토로 브랜드의 경의를 표했다면 브랜드의 장인 정신 기반을 다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토마스 마이어의 유산은 놋(knot·매듭) 디테일에서 다시 발휘된다. 기존 클러치 잠금장치 역할을 했던 기능적인 놋 모티프는 옷의 일부로 진화했다. 쇼의 첫 모델이 입은 네이비 블루 코트가 ‘계승’과 ‘혁신’의 지표. 코트의 여밈 장치가 바로 가죽으로 만든 놋 모티프였다. ‘착용자의 럭셔리’를 입증하는 장면이다. 셔츠 소매에 다는 잠금 장치인 커프 링크스에도 활용됐다. 기능성과 장식미, 이 병치되는 두 가지 요소를 마치 인트레치아토 기법처럼 유연하게 엮어버린 것이다.
과감하고 풍성한 실루엣과 다양한 소재의 활용은 루이스 트로터를 주목하게 하는 장점 중 하나. 여성 디자이너로 여성들이 무엇을 입고 싶어하는지 가장 잘 아는 디자이너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중성적인 디자인으로 남녀 경계를 두지 않았다. 셔츠는 물론 편안해 보이는 슈트는 고급스러운 가죽과 어우러지고, 니트는 가죽으로 재해석 됐으며, 재활용 유리 섬유로 된 프린지 스타일은 환상적인 색감과 함께 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움직임’에 ‘해방감’이라는 키워드를 직조해 풍성한 프린지가 만들어내는 경쾌함은 마치 살아있는 조각품처럼, 옷이 스스로 리듬을 만들어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현대 미술가 이광호가 인트레치아토 철학을 예술적으로 구현한 대형 조형물까지 어우러지니 마치 예술 작품들이 서로 대화하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냈다. 1980년대부터 2001년까지 보테가 베네타 최초 크리에이티브 리더를 역임한 여성 디자이너 로라 브레기온이 주창한 ‘베니스의 화려함, 뉴욕의 에너지, 밀라노의 본질주의’의 맥을 루이스 트로터만의 기법으로 구현해 낸 것이다. ‘하이패션’ 그 이상의 단어가 필요할 것 같은 초현실적 체험이다.
나무 굽이 있는 전통적인 작업화에서 영감받은 클로그(clog)는 투박함 대신 위트를 더했다. 완벽하게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의상에 일종의 ‘틈’을 주는 의외의 발견 같기도 하다. 말마따나 ‘부르주아적 스타일의 해독제’라 할까. 아이콘 백인 ‘베네타’ 백은 폭이 넓어진 1.2cm 인트레치아토 스트립을 활용해 보다 현대적이면서도 정교한 촉각적 질감을 부여하는 패디드 나파를 활용한 것이 이전 베네타 백과 가장 다른 점이다. 또 베이비 베네타 백으로 새로운 사이즈를 선보여 선택의 폭을 넓혔다. 1980년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로렌 허튼이 들었던 인트레치아토 클러치는 세로와 가로 축 모두 비율이 확장돼 우아한 실루엣을 완성한다. 뉴욕타임스가 ‘잇백의 향연’이라 부를 만큼 여러 디자인이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아마 이 컬렉션을 본 이들이라면 의상 한번 보고, 지갑 한번 다시 보는 걸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패션이 아니라, 스타일에 관한 것이며, 바로 본질에 대한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보테가 베네타를 향해서는 “손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패션을 다루면서 그 화려함에 압도돼 많은 이들이 잊고 있던 우리의 삶이라는 ‘본질’을, 손과 마음으로 엮어놓은 현장이었다. 미래를 향한 생명력을 알리는 맥박이 힘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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