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보이는 드로잉, 패턴… 이 모든 것이 삶이자 모험 그리고 ‘에르메스’ 그 자체
입력 2025.09.26 00:30

에르메스
2025 테마 ‘Drawn to Craft(드로잉, 창작의 시작)’ 현장

이날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 선생들은 전문 연기자 출신이었다. 학생은 전 세계에서 선별된 기자들과 에르메스의 일부 디자이너 등으로 꾸려졌다.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자 학생 여러분! 주목하세요! 드로잉 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자신을 뛰어넘는 기회를 갖게 될 겁니다. 모든 형태의 드로잉을 마음껏 표현하는 날입니다. 두려워 말고, 자신감을 갖고 자유롭고 대담하게 해보세요!”
색상이 들어간 화려한 음식(컬러 쿠킹) 만드는 워크숍의 모습.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지난 7월 1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8구의 유서깊은 학교인 리세 샾탈(Lycee Chaptal·샤프탈 고등학교). 1844년 설립돼 1876년 지금의 학교 건물이 들어선 이 역사적인 장소는 그 안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마치 ‘호그와트 마법학교’ 같은 영화 속 한 장면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학교 입구 벽면에 새겨진 이 학교 출신 유명 인사의 명단을 보니 소설 ‘춘희’ ‘삼총사’ 등의 저자 알렉상드르 뒤마, 20세기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미술 평론가인 앙드레 브루통, 유명 패션 디자이너 다니엘 에슈테, 전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등 쟁쟁했다.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날 창작예술 아카데미 실습을 마친 학생들을 위한 만찬장에 선생님이 된 연기자들이 졸업식 행사를 하고 있다. 학생들이 만든 작품들이 이날 만찬장을 꾸몄고, 학생들에겐 에르메스의 ‘수료증’이 주어졌다.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학생들을 개별 수업으로 이끌 이날의 담임 역할 선생들. 현장에선 ‘졸업반 학생’이라고 지칭했다. 의상 색에 따라 반이 나뉘었다.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이들의 이름을 뒤로하고 향한 운동장은 어느새 컬러풀한 색상으로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속에 와 있는 듯했다. 현장에 모인 이들에겐 반 배정과 함께 주황색, 노란색, 빨간색, 분홍색, 하늘색, 남색, 연두색, 그리고 진녹색 등 8가지 색상의 연구복 같은 겉옷이 주어졌고, 담당 선생님이 배정됐다. 연극적인 말투의 주임 선생님의 소개에 따라 컬러 쿠킹, 디오라마(미니어처 등을 사용해 하나의 막 앞에서 장면이나 풍경으로 형상화한 작업), 도자기, 스탬핑, 그래피티 등 여러 분야를 선도할 선생들이 등장했다. 현장에 모인 각국 기자 등은 대부분 중년으로 보였지만, 마치 아이들이 된 듯 시작 전부터 재잘재잘 쫑알쫑알하며 기대감에 발을 동동댔다. 오랜 역사의 프랑스 파리 명문 학교를 전 세계에서 선별된 이들을 위한 창작력 수업 아카데미로 변모한 주역, 바로 에르메스였다.
선생의 얼굴에 그려진 ‘드로잉’처럼 학생들은 자유롭게 그리며 자신을 표현했다.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에르메스는 매년 그 해의 핵심 테마를 선정해 각종 제품 디자인은 물론 인테리어 등에도 적용하며 에르메스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맥락적 서사를 이뤄나간다. 올해의 테마는 ‘Drawn to Craft’(드로잉, 창작의 시작). 이날 리세 샾탈에서 열린 아카데미 현장이 바로 이날의 테마를 에르메스만의 방식으로 기념하고 전 세계에 공개하는 행사였다. 보통 브랜드의 행사라면 신제품을 발표하는 등 자신의 미학과 기술력을 뽐내는 데 반해, 이날 현장에선 곧 에르메스 매장에 등장할 제품에 대한 소개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이날 체험한 것은 에르메스가 자신들의 물건을 제작할 때 어떤 식의 관점으로 접근하는지, 에르메스 근간을 지탱하는 예술관은 무엇인지, 무엇이 에르메스를 완성하는지 같은 에르메스의 정신세계를 탐방하는 일이었다.
피에르-알렉시 뒤마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가 마스터 클래스에 나서기 전에 선생들이 칠판에 복잡한 공식을 그려보이고 있다.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8가지 코스 중 한국팀이 배정된 곳은 스탬핑과 디오라마. 스탬핑 교실에선 현장에 있는 의자, 물병, 지우개 같은 여러 도구의 밑바닥에 빨간 노랑 초록 파랑 잉크를 묻힌 뒤 도장찍듯 거대한 흰종이 위에 찍어내며 일종의 패턴을 만드는 곳이었다. 동그라미, 세모, 반원, 별 같은 모양이 여러 명의 협력 작업으로 흰 종이를 장식했다. 에르메스에선 장인 한명이 하나의 제품을 완성하지만, 장인 이전에 좋은 가죽을 골라내고, 장인이 일할 공간을 디자인하며, 장인을 키워내는 육성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모두 협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공예는 결국 협업의 산물이었다.
그래피티 워크숍에 나선 학생들.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디오라마는 말, 아이, 화산, 숲, 분수대, 불, 우주인, 손가락, 중세 유럽 건물 같은 다양한 종이 그림을 자신이 설계한 대로 네모난 방에 본드로 고정해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원근감을 살리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디자인했다. 누가 잘하고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의 틀을 깨고, 기존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도전하는 이들의 작업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네모난 박스 위에 손가락을 얹는다든지 분수가 박스 위에 뿜어 오르듯 표현하는 등 어느 누구도 같은 작업이 없다는 것이 ‘유일무이’ 정신을 보여주는 듯했다.
대형 종이 위에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커다란 붓으로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보는 워크숍.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에르메스만이 해낼 수 있는 행사임이 분명했지만, 이날 ‘교장 선생님’의 마스터 클래스가 아니었다면 에르메스가 주최하는 행사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 주임의 환영사로 등장한 교장은 바로! 피에르-알렉시 뒤마 에르메스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였다. 그의 수업은 ‘드로잉’과 ‘장인 정신’에 관한 접근. 한 손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 현란한 그림이 그려진 서핑 보드를 들고 나타난 그는 위엄있고 권위 있게, 동시에 매우 친절하면서도 때로는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수줍은 듯 말을 이었다. “드로잉은 재미있고 표현적입니다. 세상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는 훌륭한 방법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입니다. 드로잉은 그 이상입니다. 드로잉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드로잉입니다. 다시 말해, 드로잉은 우리 운명의 본질입니다.”
형형 색색 케잌만드는 워크숍. 이날 케잌은 저녁 만찬때 디저트로 함께 나눠먹었다. /에르메스 ©Benjamin Malapris ©Emma le Doyen

피에르-알렉시 뒤마가 가져온 지팡이는 평소 그의 사무실에 비치돼, 그가 만나는 이들마다 자주 예시로 들며 설명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이는 양치기 지팡이입니다. 그렇게 디자인된 물건이죠. 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이것은 디자인적으로 훌륭한 조형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양치기 지팡이이면서 동시에 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겨드랑이 아래 끼워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서서 기댈 수 있을 만큼(웃음) 높이가 적당합니다. 이것이 좋은 디자인입니다.” 지팡이를 의자로 볼 수 있는 관점, 피에르-알렉시 뒤마 아니었으면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디자인의 출발점이 무엇인지 무엇을 디자인이라 하는지에 대한 지평을 넓히는 그만의 설명 방법이기도 했다.
칠판에 그가 스윽 그려낼 때, 매우 단순한 손놀림이었지만 어느새 에르메스 로고가 됐고, 빗금은 새들 스티치(두 장의 가죽을 겹쳐 한 개의 실로 양쪽 끝에 바늘을 꿰어 손으로 꿰매는 기법)가 됐으며, 이어진 스티치는 하트 모양처럼 끝이 맞물리게 됐고, 이는 벨트로 형상화됐다. ‘H=CRAFT’라고 분필로 쓰는 그의 손에 마법 지팡이가 달린 것 같았다. 그가 그려내는 대로 마치 칠판에서 제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디지털 서명처럼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인간미를 드러나는 작업이었다. 단순한 손기술을 뛰어넘어 언어와 경험, 내면의 성찰을 통해 가장 심도깊고 순수한 면모가 드로잉을 통해 구현되고 있었다.
태초의 한 획이 창조성의 출발이었다. 하나의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고, 면이 만들어지면서 형태감을 부여받는다. 이는 아이들의 낙서가 되기도, 장인의 밑작업이나 혹은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이날 현장에 있던 이들이 마치 아이가 된 듯, 복제하거나 따라 그리고 만드는 것 같은 구태의연한 사고를 버리고, 자기만의 드로잉을 완성해 나가는 작업을 직접 느끼고 즐기게 됐다. 이날 만찬장에는 학생들이 수업을 통해 완성한 화병, 색상이 있는 케이크, 거대한 붓으로 그려낸 천장 장식물 같은 것들이 내부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창의가 미학으로, 실용으로 재생된 것이다.
피에르-알렉시 뒤마는 지상에 등장하는 수많은 단어들로 ‘드로잉’을 표현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색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제스처이며, 기쁨이며, 놀라움이며, 모험이며, 탐구이며, 언어입니다, 그것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이며, 시선이며, 심지어 비전이며, 손이며, 신비입니다. 그것은 표식이며, 그것은 조명입니다, 그것은 첫 걸음이며, 그것은 우주이며, 그것은 게임이며, 그것은 기술이며, 그것은 경험이며, 그것은 꿈이며, 그것은 질주하는 말이며, 그것은 환상입니다, 그것은 초대이며, 그것은 여정이며, 교통수단이며, 그것은 삶 자체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드로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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