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게
그레고리 키슬링 신임 CEO, 국내 첫 단독 인터뷰
일명 ‘브레게 블루’라고 불러도 될 만큼 브레게 다이얼 특유의 깊이감이 느껴지는 짙은 푸른 색상의 벨벳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레고리 키슬링 브레게 신임 CEO(최고 경영자)는 마치 영화 배우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해 말 서울 워커힐 호텔 애스톤하우스에서 열린 ‘브레게 Year-end’ 전시장을 돌며 제품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선 마이크로 기술(microtechnique·광학 현미경을 다루는 학문) 엔지니어 출신이란 이력답게 ‘인간 현미경’처럼 전시 방향, 각도, 조명 등 모든 것을 체크했다.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인 르 로클, 뇌샤텔과 제네바에서 기술공학과 럭셔리 경영학 등을 전공한 뒤 20년 넘게 스와치 그룹에서 일하며 지난 2022년 오메가 부사장 직에 오른 그는 지난해 10월 브레게 CEO로 전격 임명되며 브레게의 새 시대를 알렸다. 그는 특히 올해 치러질 브레게 창립 250주년을 진두지휘하는 막중한 임무도 맡고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 ‘브레게 Year-end’ 행사에서 국내 매체로는 처음이자 단독으로 만난 키슬링 CEO는 “오늘날 고급 시계의 거의 모든 것을 탄생시킨 주역인 브레게 창업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창의성과 비전, 예술성을 오랜 기간 존경해왔다”며 약간의 긴장과 그를 뛰어넘는 설렘을 드러냈다.

“브레게는 항상 내 목록 가장 위에 있었다”
―우선 브레게의 CEO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브레게 CEO가 된다는 소식은 언제 들었는가. 그때의 기분은 어땠는가.
“너무나도 큰 영광이었다. 지난해 여름, 스와치 그룹의 하이엔드 라인인 브레게, 블랑팡, 글라슈테 등을 총괄하고 있는 마크 하이예크(Marc A. Hayek) 대표가 먼저 이 자리를 제안했다. 이후 그룹 회장인 나일라 하이예크와 그룹 CEO인 닉 하이예크 등과 함께 회의를 나누며 브레게 CEO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브레게 CEO직은 내 경력의 큰 이정표가 됐다. 내 인생에서 정말 믿을 수 없이 환상적인 여름이었다.”
―그동안 브레게에 대해 특히 높이 평가한 점은 무엇이었나.
“브레게는 워치메이킹 업계에선 항상 모범사례처럼 최상위권에 꼽히는 브랜드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나는 마이크로 기술 분야에서 워치메이킹을 배웠고, 이전 직장(오메가)에서 새로운 무브먼트 개발을 위한 엔지니어로 일했기 때문에, 항상 브레게의 발명에 대해 배워야 했다. 브레게는 항상 제(가 지향하는) 목록의 맨 위에 있었고, 브레게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브레게를 팔로(follow)해왔다.”

―스와치 그룹 산하인 오메가에서 20년 가까이 혁신적인 제품을 주도해왔다. 오메가 크로노차임을 탄생시키는 등 오메가가 하이엔드 브랜드로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기틀을 세우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오메가 CEO인 레이날드 애슐리만의 반응은 어땠는가. 그의 격려나 조언이 있었다면?
“레이날드 애슐리만은 정말 멋진 리더다. 우리는 20년을 함께 일했고 환상적인 여정을 보냈다. 많은 좋은 추억도 쌓았다. 그는 항상 내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는 상사이지만 친구이기도 해서 나에게 ‘나 자신이 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또 브랜드를 깊이 있게 이해하라고 당부해줬다. 아무리 브레게를 선망하고 추종해 왔다고 해도, 브레게가 가진 가치와 그 이면에 담긴 수많은 발명의 역사 등을 충분히 익히고 심도 있게 내재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애슐리만의 조언대로 브레게는 다른 브랜드, 다른 제품들과는 기본적인 철학도, 제조 공정도 매우 다르다. 브레게는 전용 칼리버(내부 부품)도 많다. 그만큼 인지도도 높고, 제품에 대한 지식 수준이 매우 뛰어난 마니아층도 상당하다. 브레게는 하나의 칼리버를 하나의 타임피스, 하나의 레퍼런스에만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루 이틀 만에 아이디어를 떠올려서 실행하려는 성급함과 조바심, 우매함을 내려놓게 하는 시간이었다. 오메가를 떠나는 건 나름의 슬픈 이별이기도 했지만, 정말 인간적인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브레게에서의 보낸 첫 달은 어땠나.
“입사 며칠 전 파티에서 모든 사람 앞에 ‘나’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개발, 제조, 고객 서비스, 마케팅, 재무, 상업 등 거의 모든 사람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조직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매일, 매주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과제를 논하고 있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가졌다. 정말 매일이 꽉 찬 하루였다. 개발부터 고객 서비스, 마케팅까지 하루에 10개가 넘는 주제를 다양한 인재들과 논의하고 토론하고 새로운 것을 발굴하고 의제를 변경하기도 한다. 24시간 360도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도 굉장히 뛰어난 인재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 선보이기 위해 함께 의기투합하는 것, 이것이 아마도 CEO가 되는 것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일 것이다.”

“올해로 250주년, 매일 브레게 이야기로 가득차게 만들겠다”
―브레게의 역사를 꿰고 있다. 브레게에 와보니 가장 좋았던 것이나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인가. 딱 하나만 꼽는다면?
“너무나 좋은 것이 많아 한 가지를 택한다는 건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웃음) 그래도 단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브레게의 직원들이다. 그들은 브랜드에 헌신하고 브랜드에 소속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디자인에서 창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것을 발명하려는 정신, 정말 선구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새로운 시계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다.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예술적 세공 기술과 장식 기법 등 예술적 공예) 장인을 비롯해 모든 장인들이 각 시계에 대한 전문 지식과 기술력, 최고의 예술성을 보유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 디자인, 시계 조립, 유통까지 모든 분야에 속한 직원들이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자부심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브레게에 대한 열정을 설파하는 동안에도,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듯 미세한 구김이나 흐트러짐 하나 없는 그의 의상을 보다 보니, 그의 손목에 시선이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블루 그랑 푀(grand feu) 에나멜 다이얼을 장착한 ‘클래식 투르비용 엑스트라 플랫 5367’이었다. 벨벳 수트의 은은한 광택감과 다이얼의 매끈하고 영롱한 검푸른 빛이 어우러져, 의상 선택의 시작과 끝이 바로 시계라는 걸 보여주는 ‘전략적 선택’의 ‘바른 예시’ 같았다. 브레게 하면 떠오르는 기요셰 공법이 아닌, 역시 공정이 까다롭기로 알려진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을 택해 브레게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력과 미감(美感)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 모델이 돼 알리고 있었다. 최근 신제품 중 하나를 착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이 아끼는 제품을 착용했다는 건 ‘브레게 유니버스’ 속에 이미 안착했다는 걸 확인시키는 듯했다.
*Grand Feu:그랑 푀는 이산화규소와 산화물 분말의 혼합물인 컬러 파우더를 물에 녹인 다음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다이얼에 적용한 기법이다. 진정한 비밀은 소성(燒成) 과정에 숨어 있다. 각각의 층과 컬러는 섭씨 800도가 넘는 특정 온도에서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시간 동안 추가 소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같은 열에 노출된 에나멜은 점화 후 용융(고체가 열에 의해 액체가 되는 현상)돼 각각의 층을 형성한다. 하나의 다이얼을 원하는 색조로 연출하기까지는 몇 주가 걸릴 수 있다.

―2025년은 브레게 250주년이기도 하다. 정말 중요한 시점에 CEO를 맡게 됐다.
“브레게의 목표는 전통과 혁신을 혼합하는 것이다. 창립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발명을 멈추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개선했다. 브레게가 내놓는 시계마다 새로운 컴플리케이션과 새로운 발명품, 새로운 디자인이 적용돼 이전과 차별화하며 진화해 나갔다. 브레게는 창립자의 정신과 전통, 발명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브레게는 1801년 특허 출시된 투르비용이 있다. 최근에는 두께가 3mm에 불과한 가장 얇은 오토매틱 셀프 와인딩 투르비용을 출시한 바 있다. 우리 컬렉션에는 퍼페추얼 캘린더, 미닛 리피터, 에콰시옹 마샹(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상용시와 태양을 기준으로 지구의 자전에 의해 결정되는 진태양시를 보여주는 것) 같은 기술력은 물론이고, 투르비용과 그랑 소네리를 갖춘 포켓 워치 같은 역사성 있는 시계도 있다. 또 매일 정확하고 정밀한 크로노미터 시계를 위한 자성 피봇(magnetic pivot·밸런스 축이 되는 탄소강 바와 보석 뒤에 있는 ‘희토류’로 만든 두 개의 자석으로 구성돼 기계식 시계에서 자성의 부정적인 영향을 단순히 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제어하여 밸런스 축의 회전력과 안정성을 개선하는 것·2010년 특허)도 갖고 있다. 스와치 그룹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고급 시장을 선도하는 기술과 발명을 지속적으로 선보여왔다. 우리는 계속해서 모방하지 않고 혁신을 계속할 것이다.”
―250주년을 기점으로 또 다른 도약을 위해 벌써부터 머릿속에 기획해놓은 것들이 많을 것 같다. 조금 귀띔해 준다면.
“250주년이란 건 정말 브랜드에 있어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기록적인 일이다. 브랜드로서도 대단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번 행사는 하루가 아닌 1년 내내 브레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목표다. 브레게에 대한 놀라움으로 가득한 2025년이 되길 바란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브레게를 하루 만에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고, 제품을 보여주고, 과거 역사적인(antique) 타임피스 간의 강력한 연결을 만들고 싶다. 우리는 과거에 선보였던 고전적인 제품(앤티크 피스) 측면에서 엄청난 유산(heritage)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대 컬렉션을 연결하는 한편, 새로운 제품으로 모두를 놀래킬 준비를 하고 있다.”
☞기요셰(Guillochage)

1786년 아브라함-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1747-1823)가 워치메이킹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원래 가구 일부나 제복 버튼 등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나무, 상아, 뿔, 조개껍데기 속 진주층(mother of pearl) 등의 소재를 깎아내 완성했다. 창립자는 기요셰 기법을 시계에 응용해, 광택감은 물론 장식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뿐만 아니라 기능적 측면도 고려했다. 일반적인 마모에 더 강하게 했고, 빛 반사를 줄여 다이얼의 가독성을 높이는 등 다양한 장점 덕에 브레게 외에 다른 고급 시계도 다수 응용하는 장식 기법 중 하나다.
엔진 터닝이라고도 불리는 기요셰 장식은 특정 소재를 직선, 곡선 혹은 비정형화된 선 등으로 정교하게 새겨넣는 작업으로, 장인들이 특별한 기계를 이용해 구현한다. 스위스 브레게 매뉴팩처에는 30대의 엔진-터닝 기계가 설치돼 있다. 20여명 장인이 다양한 범주의 기하학적 패턴을 만들어 냈고, 브레게에선 기요셰 기법만을 위한 연구 및 개발 부서를 새롭게 신설하기도 했다. 기요셰는 다이얼, 케이스, 로터 등 브레게 시계의 거의 모든 부품에 적용되고 있다.
☞투르비용(Tourbillon)

프랑스어로 ‘회오리바람’을 뜻하는 투르비용은 1801년에 브레게의 창업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처음 개발해 특허를 획득한 밸런스 이스케이프먼트(escapement·기계식 시계에서 초침이 꾸준히 움직이게 만들며 정확한 시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부품. 시계의 심장부라 불리기도 한다) 시스템이다. 지구의 중력과 착용 위치에 따라 변하는 무게 중심이 주는 시계의 부정확성을 극복하기 위한 기술이다.
1801년 6월 26일 프랑스 내무부로부터 특허 취득한 인증서는 당시 공화정 캘린더 7 Messidor(프랑스 혁명력의 제10월로 태양력의 6월 19일부터 7월 18일까지), Year IX로 기록돼 있다.
투르비용은 206개 정도의 부품을 0.3g 이하로 제작해야 하는 복잡 기술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스위스 시계 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 시계 제작자(워치 메이커) 중에서도 투르비용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120여명 정도뿐이다. 투르비용 1개 제작 기간은 짧게는 4개월에서 1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인그레이빙(Engraving)

인그레이빙(새기는 작업) 역시 오늘날 브레게의 DNA 일부로 자리잡았다. 쌍안경을 제외한 모든 제작 도구와 과정은 수백 년 전의 것과 동일하다. 인그레이빙 작업을 마친 구성품은 왁스를 사용해 홀더에 고정한다. 필요할 경우 특정 구성품과 정확히 일치하는 형태의 홀더를 별도로 제작하기도 한다. 장인들은 조각칼을 잡은 손을 움직이며 작업을 하기도, 혹은 조각칼을 고정하고 홀더를 돌리며 작업하기도 한다. 장인들은 이를 통해 시계 무브먼트를 구성하는 메인 플레이트(plate·판)와 브릿지(다양한 부품을 제자리에 고정하고 시계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것)에 예술적인 패턴을 새겨 넣는다.
‘음각화’를 의미하는 ‘taille douce’는 깊이를 섬세하게 조절하면서 가늘고 긴 선을 새겨 패턴을 만드는 작업으로, 극도의 정교함이 필요하다. 선을 처음 새기기 위해 필요한 압력이 그 이후의 압력보다 더 강해야 하기 때문에 장인들은 감각에만 의지해 첫 새김과 그 이후에 필요한 압력을 조절한다. 복잡하고 어려워 최근 들어 더욱 드문 작업이며, 장인들이 고유한 감각을 익히기까지는 수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