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팔레 그랑 피날레!
입력 2024.08.16 00:30 | 수정 2024.08.16 00:30

[부티크 팀장 레터]


TV화면으로 본 2024 파리 올림픽 그랑 팔레(grand palais·사진) 경기장은 눈부셨다. 오상욱의 첫 금과 남자 펜싱 사브르 3연패가 치러진 그랑 팔레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열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아르누보 건축 양식을 따른 곳으로 1만7500 평방미터(약5300평)에 층고만 45m높이다. 강철과 유리 등으로 된 아치형 지붕이 눈길을 끈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을 만드는 데 철재 프레임에 7300톤이 사용된 반면, 그랑 팔레는 8500톤 이상이 쓰였다.
양궁 경기가 열렸던 앵발리드(Invalides)도 마찬가지다. 양궁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올림픽 금메달 역사를 새로 쓴 김우진마저도 앵발리드를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올림픽 경기장이라 말하기도 했다. 한국 남·녀 양궁 대표팀 과녁을 좇다보면 화살 끝이 향하는 장면에 살짝 보이는 돔의 모습이 바로 ‘오텔 데 쟁발리드(앵발리드 호텔)이다. TV중계진뿐만 아니라 보통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무덤으로 알려진 앵발리드지만, 이곳은 1670년 ‘태양왕’이라 불린 프랑스 루이 14세가 퇴역 군인들을 위한 요양소로 지은 시설인 앵발리드는 군인들이 치료를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소가 됐다.
어쩌면 과거 활과 화살로 전쟁에 나섰던 이들을 추모하면서 이를 올림픽의 정신으로 승화할 때 가장 적합한 장소가 앵발리드였을 것 같다.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라톤 결승선 역시 앵발리드 광장에 배치된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마라톤의 유래가 아테네-페르시아 전쟁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2.195km를 내달린 그리스 병사의 걸음에서 시작됐다는 걸 감안하면, 스포츠 정신이란 죽고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승리에 도취되라는 얘기가 아니라, 모두가 힘들고 어려울 때 조금이라도 즐거운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보자는 게 아닐까. 운영 미숙 등 수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러한 문화 유산 덕에 파리 올림픽의 숨은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랑 팔레와 앵발리드가 반가웠던 건 우리 선수들 때문만은 아니다. 프랑스가 올림픽을 통해 세계에 다시금 선보인 그랑 팔레, 앵발리드, 에펠탑 앞 트로카데로 광장, 콩코트 광장 등 올림픽이 열리는 장소는 프랑스 최대 자존심인 파리 패션 위크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펜싱 종주국 프랑스가 택한 그랑 팔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 샤넬이 파리 패션 위크 피날레를 장식하며 쇼를 선보여왔다.
칼 라거펠트 생존 당시 그랑 팔레에서 열렸던 샤넬 패션쇼 피날레. 높은 층고와 넓은 규모를 고려해 로켓 발사 퍼포먼스에 해변, 대형 슈퍼마켓 등 다양하게 장소를 활용했다. /조선일보 DB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생존 당시인 2005년부터 이곳에 인공 해변, 로켓 발사대 및 슈퍼마켓 등 정교한 세트를 지어 화제 되기도 했다. 올림픽 등을 필두로 ‘지속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4년전부터 총 4억 6600만 유로(6900억원)을 들여 리노베이션했다. 앞으로는 각종 전시회는 물론 박람회 등 글로벌 행사를 유치할 예정이다. 앵발리드 광장 역시 디올, 지방시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패션쇼가 열리던 공간이다. 에펠탑이 번쩍거리는 저녁 시간에 맞춰 트로카데로는 생로랑(이브 생 로랑)의 패션쇼가 열린다.
불과 수년 전, 기자가 파리 패션위크 현장을 찾았을 때다. 브랜드 현지 담당자들이 빡빡한 좌석을 두고 어떤 식으로 배치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중 한 내용은 이랬다. “중국과 일본 측의 관계가 껄끄러울 수 있으니, 그 사이를 아무나 채워라.” 여기서 그 ‘아무나’가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아마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면 ‘동양인’ 따위는 못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터라 어쭙잖게 알아들었지만 내용은 처참했다. 이미 배정이 끝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항의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아무나’로 취급 받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존재감을 알릴 수 있을까 고심했다. 기사도 열심히 쓰고, 본사에 각종 이메일 인터뷰 요청을 보내며, 온라인 화상 인터뷰에도 적극 나섰다. 무작정 쓰고 또 달려드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나’의 존재감이란 그랬다.
그 사이 K팝, K드라마 등으로 세상이 변했다. 그렇게 노력했어도 K팝을 사랑한다는 프랑스에서도 이번 올림픽에선 ‘북한’으로 호명하는 문제도 있었다. 한국 스타들이 1열을 장식한다며 미국 뉴욕타임스 등을 비롯해 해외 유명 매체를 장식하고, 유명 브랜드들이 앞다퉈 한국 스타들에게 매달려도 아직도 ‘아무나’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폐막식에서 다음 올림픽을 향한 성화가 이어지듯, 스포츠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펜싱 종주국 프랑스를 꺾고 우리나라가 메달을 딴 것처럼, 태권도에선 종주국 우리를 꺾고 승리를 거둔 난민팀 등이 눈길을 끈다. 유엔난민기구와 세계태권도연맹이 협력해 난민들의 자립심을 강화하는 데 힘쓴다. 전쟁과 학대 폭력이 위협해도 그들의 정신은 꺾이지 않는다.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려는 움직임이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 ‘아무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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