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의 기상학’이라 해야 할까. 기후와 환경의 변화는 패션 소재와 디자인 전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친다. 역대급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찾아올 거라는 이번 여름, 몇 시즌 전부터 트렌드 귀환을 예고했던 플라스틱 소재 젤리 슈즈(jelly shoes)와 고무 소재 레인부츠가 빅 트렌드가 됐다.

◇하이 패션계로 초대된 추억의 젤리 슈즈
젤리 슈즈의 역사는 PVC(폴리염화비닐: 염화비닐을 주성분으로 하는 플라스틱)가 발명된 1940-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PVC는 긴 전쟁으로 가죽이 부족해진 시대에 가죽 슈즈를 대신할 저렴한 옵션이었다. 젤리 슈즈라는 이름은 1980년 파리에서 토니 알라노(Tony Alano)와 니콜라스 길런(Nicolas Guillon)이 설립한 젤리 슈즈(Jelly Shoes)라는 프랑스 회사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젤리 슈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건 1980년대 초 브라질의 샌들 제조 회사 그렌데네(Grendene)가 패셔너블한 젤리 슈즈를 선보이면서다. 마돈나,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 그 시대 패션 아이콘들이 젤리 슈즈를 일상에서 즐겨 신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곤 했다. 90년대가 되며 젤리 슈즈는 더 발전된 소재와 새로운 스타일로 다양화 되어갔다. 특히 국내에선 90년대에 젤리 슈즈의 인기가 절정을 이뤘다.
그리고 지금, 럭셔리 패션 하우스들이 젤리 슈즈를 하이 패션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임을 강조하는 럭셔리 브랜드들의 젤리 슈즈는 패션쇼 런웨이 위에서 클래식한 팬츠, 정교한 테일러링의 수트, 우아한 실루엣의 드레스들과 매치되고 있다. 80-90년대와 다르게 더 우아해진 젤리 슈즈라고 해야 할까. 처음엔 가죽을 대체할 저렴한 옵션으로 탄생한 젤리 슈즈는 이브닝 드레스와도 매치될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러워졌다. 특히 럭셔리 브랜드의 젤리 슈즈는 각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디테일이 잘 살아있는 디자인이라 더욱 매력적이다.
그럼 이번 여름 단 하나의 젤리 슈즈를 선택한다면 어떤 스타일을 눈여겨봐야 할까? 먼저 가장 쉬운 접근법은 플리플랍(flip-flop: 조리 슬리퍼)이다. 에르메스의 플리플랍 젤리 슈즈 ‘에제리’와 ‘아일랜드’ 샌들은 품절 사태로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어졌지만 발렌티노, 발렌시아가, 페라가모, 토리 버치 등 타 브랜드에서 플리플랍 스타일의 젤리 슈즈를 만날 수 있다.
트렌디하게 젤리 슈즈를 즐기고 싶다면, 물이 잘 빠지게 구멍을 낸 어부의 샌들에서 탄생한 피셔맨 샌들(fisherman sandal)과 그물망처럼 생긴 피쉬넷 샌들(fishnet sandal)을 추천한다. 프라다, 구찌, 베르사체, 모스키노 등에서 피셔맨 샌들 스타일의 젤리 슈즈를 선보이고 있다. 피쉬넷 스타일의 젤리 슈즈는 더 로우(The Row)가 대표적이다. 더 로우는 2024년 프리 폴(Pre-Fall) 컬렉션에서 특유의 클래식과 미니멀리즘으로 가득한 의상들을 피쉬넷 스타일의 ‘마라 플랫 바이닐’과 매치시켰다.
포멀한 스타일을 원한다면 플랫 슈즈를 선택하면 된다.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은 페라가모의 발레리나 젤리 슈즈다. ‘바라 보우 젤리 발레 플랫’은 페라가모의 대표 시그니처인 바라 리본 포인트를 더한 젤리 슈즈다. 슈즈 양옆과 앞 코 부분에 트임이 있어 시원한 여름 룩을 완성해 준다. 또한 스타일의 모험가라면 하이힐에 도전해 볼 수 있다. 핑크와 실버 2가지 컬러의 크리스챤 루부탱 ‘젤리 스트라스’는 8cm 굽 높이의 스틸레토(stiletto: 뾰족한 굽의 구두)로, 이브닝 슈즈는 물론 웨딩 슈즈로도 신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여름의 대표 패션 슈즈 된 레인부츠
동시에 길어진 장마와 함께 레인부츠가 여름 시즌 메인 패션 아이템이 됐다. 최근 레인부츠 트렌드는 발목 높이가 짧은 숏 레인부츠(short rain boots)다. 젤리 슈즈도 비 오는 날에 신을 수 있는 멋진 패션 슈즈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날은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롱 레인부츠를 신기에는 덥고, 신고 벗는 수고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발목 높이의 숏 레인부츠가 사랑받고 있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선보인 패셔너블한 숏 레인부츠는 가죽 앵클 부츠(발목 높이 부츠)를 신듯 스타일링할 수 있어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클래식과 미니멀리즘의 애호가들이라면 보테가 베네타의 레인부츠 시리즈가 이상적이다. 부츠 전면에 보테가 베네타의 시그니처인 인트레치오(intreccio: 엮어 짜는 기법) 패턴이 장식된 ‘파이어맨 앵클 부츠’는 클래식한 팬츠나 데님 팬츠와도 근사하게 조화된다. 또한 옆면에 물결 모양이 장식된 ‘퍼들 앵클 부츠’도 도심 속 일상에서 신을 수 있는 심플한 디자인을 지니고 있다.
버버리의 숏 레인부츠 ‘체크 러버 마쉬 로우’는 실용적이면서 스타일리시하다. 굽이 낮은 디자인은 투명한 고무 소재 안으로 버버리 체크 프린트가 드러나며 밑창도 투명하다. 6.5cm의 높이의 ‘체크 러버 마쉬 힐’은 패브릭처럼 보이는 밑창의 독특한 텍서처가 특징이다. 두 가지 높이 모두 둥근 앞 코와 신고 벗기 편안한 슬립온(slip-on: 발을 미끄러지듯 넣어 신을 수 있는 신고 벗기 편한 스타일) 스타일로, 일상에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더욱 고급스럽고 패셔너블하게 진화되어 돌아온 젤리 슈즈, 그리고 폭우 속에서도 스타일을 지켜주는 숏 레인부츠. 이번 여름, 젤리 슈즈와 숏 레인부츠는 멋쟁이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머스트 해브 슈즈(must have shoe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