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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을 읽고 저장하거나 지우는 건 숨 쉬는 것과 다름 없는 일상이다. 그러다 얼마 전 나도 모르게 숨을 덜컥이며, 멈칫하고 말았다. 메일 속 사진이 제대로 보내진 건지, 혹은 관계자 실수로 보내져서 ‘회수’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메일이 오는 게 아닐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구찌에서 온 메일이었다. 구찌를 포함한 럭셔리 브랜드들이 그렇듯, 항상 화려한 레드카펫 룩이나, 새로운 컬렉션, 혁신적인 신제품 등 사진 한 장에도 여러 번의 수정과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수십 수백번의 확인을 거쳤을 법한 정제된 모습을 마주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사진의 주인공이야 아주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다. 미국 경제를 들썩이며 유명 대학 수업 과정에도 등장한 파워 우먼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눈길을 끈 건 그녀를 프레임에 담은 사진가의 소속회사였다. 백그리드(Backgrid). 미국의 대표적인 셀럽 전문 사진·영상 회사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스타를 따라다니며 ‘파파라치 컷’을 주로 찍는 회사다. 사진 역시 백그리드 ‘명성’(?)에 맞게 테일러 스위프트가 그의 연인인 미식축구선수 트래비스 켈시와 함께 미 캘리포니아의 유명 초밥집에서 저녁 데이트를 마치고 어두운 길을 편한 복장으로 걷는 모습이다. 구찌 측은 사진을 게재할 경우 백그리드 크레딧을 반드시 구찌와 함께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테일러 스위프트가 착용한 가방이 오리지널 GG 구찌 루체(Luce) 백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 가방은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을 둘러싼 쇠장식물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구찌의 이번 사진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건 최근 부사장(deputy CEO)으로 지난 2018년부터 루이 비통의 커뮤니케이션 및 이벤트 담당 수석 부사장을 역임한 스테파노 칸티노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디자이너와 CEO 교체로 부침을 겪은 구찌가 경쟁사인 루이 비통으로부터 ‘인재’를 영입했기에, 이번 같은 행보는 앞으로 구찌의 더욱 적극적인 마케팅을 예고하는 듯 했다.

사실 구찌가 파파라치 스타일을 처음 시도한 건 아니다. 이미 파파라치 스타일의 캠페인(광고)까지 선보인 적 있다. 올초 공개된 발리제리아 여행 캠페인은 중국의 장첸과 니니가 공항에서 겪는 만남과 설레는 출발에 대해 그렸다. 이전에 선보인 켄달 제너와 배드 버니의 광고 캠페인의 연장선상이지만 연인이었다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는 둘의 모습에서 장첸과 니니 역시 영화 속에서만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진들도 사람보다는 구찌의 제품이 먼저 보이는 경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테일러 스위프트의 경우 브랜드와 ‘약속된’ 사진이라고 보기엔 정말 파파라치 같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최근 열린 코첼라에서도 구찌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포착돼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스위프트의 스니커즈 사진은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찾아내는 ‘명탐정’ 팬들 덕분에 급속히 입소문(바이럴)이 났다.
파파라치 광고 캠페인으로 대중의 감탄을 일으킨 건 지난 2023년 여름 미국 힙합 가수 에이셉 로키(ASAP Rocky)와 톱 모델 켄달 제너의 사진이었다. 언제나 파파라치의 피사체가 되어주던 이들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길을 걷거나, 꽃이나 화분을 한 쪽 팔에 안고, 혹은 운동복 차림으로 열심히 달리는 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패션 화보가 주는 창작성과 판타지, 예술성도 있겠지만 일상의 참신성이 주는 울림은 상상 이상이었다. 안 그래도 패셔너블한 그들이 ‘나 패션이야’라고 한껏 힘주는 모습보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일부러 외면한 듯한 모습이 아니라, 시선을 자연스럽게 아무데나 둔 모습이 의상이나 가방 등과 훨씬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패션계에서 많이들 이야기하듯, 옷에 압도되지 말라는 이야기처럼 그들의 파파라치 느낌 사진은 인간미가 느껴지면서도 가장 패셔너블한 일상을 엿보게 했다.

그랬던 그 사진이 바로 보테가 베네타의 캠페인 일환이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또 한번 무릎을 쳤다. 여느 파파라치 컷이 그렇듯, 그들이 입은 옷에 대한 정보는 빠르게 퍼졌고, 그들이 (패셔니스타답게) 보테가 베네타의 신상 가방이나 의상, 운동화 등을 먼저 신고 등장했기에 보는 이들 사이에선 바로 ‘머스트 해브 아이템(꼭 사야 되는 제품)’으로 급부상이 했던 터였다. 이미 너무나 자연스럽게 뇌에 각인 됐기 때문에 광고든 아니든 상관 없었다. 세계적인 수퍼스타였기에 럭셔리 제품은 언제든 착용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극도로 일상과 어우러진 편안한 모습이었기에 누구나 따라하고 싶게 만들었다. 이 캠페인은 그해 가장 화제된 패션 캠페인으로 자리매김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팔로워 숫자, 화제성(바이럴), 미디어 노출 등이 브랜드의 마케팅 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요즘 파파라치 컷은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K팝, K드라마 스타들이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들이 ‘뜨기만’ 하면 바이럴 숫자가 여느 할리우드 수퍼 스타들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2000년대 느낌의 파파라치 컷 캠페인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필수 선택이 돼 버린 듯 하다. 과거 발렌시아가가 2018년 파파라치 컷을 이용해 광고 캠페인을 벌인 뒤 발렌시아가는 최근 다시 이러한 파파라치 사진을 캠페인에 적극 이용하고 있다.
광고 캠페인뿐만 아니라. 인플루언서들 사이에선 파파라치 컷 스타일의 사진이 인기다. 과거 파파라치 하면 무조건 피하고, 얼굴을 붉히고 사생활을 침범하는 ‘사회악’처럼 존재했던 것이 어느덧 악어와 악어새처럼 수요에 따라 움직이는 공생관계가 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되새기는 교훈. 사회에 발을 들인 이상 영원한 적이란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