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끝에 얻은 순수한 달콤함, 아이스와인
  • 안미영 와인21 편집장
입력 2023.12.26 13:37

와인메이커들은 종종 자신의 일을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하곤 한다. 적절한 포도 수확 시기를 기다려야 하고, 좋은 포도를 선별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원하는 와인이 완성되기까지 긴 숙성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서둘러 완성하는 방법을 추구할 수 없고 매 단계마다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전 세계 여러 와인 산지에서 고급 와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와인들은 이런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탄생한다.
아이스 와인을 위해 수확을 기다리는 언 포도

겨울철 언 포도를 수확해 만드는 아이스와인(Ice wine)은 특히 인내의 시간 끝에 만들어지는 와인이다. 달콤한 맛이 나는 스위트 와인을 생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포도의 발효를 중단해 당분을 남기거나, 포도를 건조시켜 당도를 높일 수도 있다. 아침에 안개가 끼고 낮에는 햇볕이 쬐는 건조한 환경에서 곰팡이에 감염된 노블 롯(noble rot)으로 생산하는 귀부 와인도 유명하다. 아이스와인은 귀부 와인과 달리 건강한 포도를 사용하고, 포도가 나무에 달린 상태로 자연적으로 얼기를 기다려 수확한다. 일반적인 포도 수확철을 지나 12월이나 1월경 기온이 영하 8도 이하로 떨어지면 포도의 수분이 얼면서 과즙이 농축되는데, 이런 포도를 사용하면 당도가 높은 아이스와인을 만들 수 있다.
겨울철 언 상태의 포도

아이스와인은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하고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디저트 와인 중에서도 특히 고급 와인으로 꼽힌다. 여름에는 포도가 건강하게 잘 익을 수 있도록 충분한 일조량이 필요하고 겨울에는 기온이 확실히 떨어져야 하는데, 캐나다와 독일 등 일부 산지만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수확 과정에서 기온이 오르면 포도가 녹거나 맛이 변질될 수 있으니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추위를 견디며 수확해야 한다.
흔히 생산량을 이야기할 때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한 병의 와인이 생산되는 정도라면 고급 와인으로 인식되는데, 언 포도에서 소량의 농축된 과즙을 얻는 아이스와인은 그보다 훨씬 적은 양이 생산된다. 일반적인 와인 용량의 절반인 375ml 한 병을 생산하기 위해 약 3kg의 포도가 필요하다. 아이스와인이 작은 사이즈로 나오는 것은 스위트 와인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생산량과 가격적인 이유도 있는 셈이다. 쉽고 비용이 적게 드는 방식을 찾는다면 인위적으로 냉동한 포도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대표적인 아이스와인 생산국들은 법적으로 최저 수확 온도를 정해두고 있고, 자연적인 방식으로 생산한 와인만을 아이스와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의 빈야드 풍경

아이스와인을 처음 생산하기 시작한 곳은 18세기 후반 독일이었다. 제때 수확하지 않은 포도가 갑작스러운 한파에 얼어버렸는데 그 포도를 이용해 훌륭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발견했고, 그때부터 독일에서는 아이스바인(Eiswein)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먼저 만들기 시작한 건 독일이지만 현재 세계 최대의 아이스와인 생산국으로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는 캐나다다. 와인 생산국으로는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던 캐나다가 아이스와인으로 세계적 유명세를 떨치게 된 건 특수한 기후조건 덕분이다. 아이스와인의 주요 생산 지역인 온타리오 호수 남서부의 나이아가라 반도(Niagara Peninsula)는 호수의 영향으로 기온이 천천히 떨어지고 또 천천히 올라오기 때문에 포도가 완전히 익을 수 있고, 최상급 아이스와인 생산에 적합한 환경이다.
필리터리 에스테이트 와이너리의 아이스 와인들. VQA 마크를 확인할 수 있다

필리터리 에스테이트 와이너리의 숙성실

1980년대부터 캐나다 온타리오의 추운 겨울이 아이스와인 생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아본 이들이 이곳에서 아이스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현재 온타리오에는 180여 개의 와이너리가 존재한다. 1988년에는 온타리오의 와이너리가 모여 ‘VQA(Vintners Quality Alliance)’를 만들었고, 1991년 이니스킬린(Inniskillin)이 생산한 아이스와인이 보르도에서 개최된 와인 전시회 비넥스포(Vinexpo)에서 수상하며 캐나다 아이스와인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현재 VQA는 와인 품질을 관리하기 위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자연적으로 언 포도만 허용하고 영하 8도 이하에서 수확해야 한다는 것이 규정으로 명시돼 있다. 포도 품종과 지역, 당도에 대한 규정도 있다. 와인을 구입할 때 병에 VQA 마크가 있다면 까다로운 규정을 지켜 생산해 품질을 인증받은 캐나다 아이스와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필리터리 에스테이트 와이너리 입구

필리터리 에스테이트 와이너리 내부

필리터리 에스테이트 와이너리의 양조 시설

캐나다의 아이스와인 와이너리들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인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에 위치해 여행객들에게도 인기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차로 30분이면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Niagara on the Lake)에 도착하는데, 이곳에 많은 와이너리들이 자리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아이스와인 생산자인 필리터리 에스테이트 와이너리(Pillitteri Estates Winery)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와이너리 중 하나다. 필리터리 가족이 운영하는 이곳은 1988년 비달(Vidal) 품종을 사용해 아이스와인을 만들기 시작했고 1993년 와이너리를 설립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가장 다양한 스타일의 아이스와인을 생산하는데, 아이스와인에 주로 사용되는 리슬링과 비달 외에도 세계 최초로 쉬라즈와 산지오베제 품종을 사용해 아이스와인을 만들기도 했다. 방문객들을 위한 투어 프로그램을 잘 갖추고 있으니, 예약 후 방문하면 와이너리 시설을 둘러보고 다양한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다.
여름철 무르익고 있는 비달 포도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수확한 포도를 엄격한 규정에 따라 생산한 아이스와인에서는 깊고 순수한 당도가 느껴진다. 달다는 이유로 디저트 와인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아이스와인은 의외로 여러 가지 음식과 함께하기 좋다. 달콤한 맛이 향신료와도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멕시코 요리나 인도 요리에 곁들여도 잘 어울린다. 또한 푸아그라나 파테와 함께 즐겨도 조화롭고 블루 치즈처럼 풍미가 강한 치즈와의 페어링도 추천할 만하다. 물론 디저트와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궁합을 보여준다. 아이스와인을 압도할 정도로 단맛이 강한 디저트만 아니라면 대체로 잘 어울린다.
겨울철 필리터리 에스테이트 와이너리의 빈야드 풍경 (사진제공: 하이트진로)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에서는 매년 1월에 아이스와인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아이스와인은 그만큼 겨울에 잘 어울리는 와인이다. 한파에 자칫 우울감이 들 것 같은 날, 아이스와인이 선사하는 순수한 달콤함이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우선, 이번 연말에는 케이크에 아이스와인 한 잔을 곁들여 그 달콤한 조화를 음미해 보는 건 어떨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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