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박서보가 남긴 위대한 명품 유산
입력 2023.11.15 09:22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박서보 작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이 되었다. 지난 10월 14일, 박서보 작가가 향년 92세로 별세한 소식이 전해지며 추모의 물결이 아트, 패션, 리빙 등 모든 문화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지난 11월 9일, 160년 전통의 프랑스 포쉘린 브랜드 베르나르도(Bernardaud)가 고(故) 박서보와 협업한 아티스트 에디션을 전세계 최초로 ‘베르나르도 한남’에서 공개했다. 전시 프리 오프닝 파티가 진행되는 ‘베르나르도 한남’은 박서보 작가의 마지막 협업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예술, 패션, 문화계 인사들과 아트 애호가들로 물결쳤다. 새하얀 아트 월에는 박서보 작가의 묘법을 정교하게 재현한 두 점의 세라믹 작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160년 전통의 프랑스 포셀린 브랜드 베르나르도(Bernardaud)와 한국의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 고(故) 박서보가 협업한 아티스트 에디션. 첫 번째 ‘묘법 No.1-23’은 박서보 작가가 제주도의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하늘과 물 사이의 그 어딘가를 만들기 위해 흰색이 많이 들어간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색을 공기색이라 불렀다. 베르나르도 제공.

두 번째 ‘묘법 No.2-23’은 수확의 색, 즉 뿌린 것을 거두는 계절의 색이다. 박서보 작가가 선물로 받은 올리브가 와인과 잘 어울려 그 매력에 빠졌는데, 특히 잘 익은 올리브의 색에서 작가가 어릴 때 서있던 보리밭을 떠올렸다고 설명한다. 베르나르도 제공.

1967년 그는 세밀한 선을 반복하여 그려 넣는 ‘묘법’ 연작을 시작했다. 1970년대까지는 캔버스를 물감으로 뒤덮고 채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물감으로 선을 지워버리고, 다시 그 위에 선을 긋는 작업을 되풀이 했다. 작가는 이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합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성의 흔적이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 이후 묘법은 한지와 수성안료로 작업됐고, 2000년대의 ‘묘법’은 캔버스에 한지를 붙이고 규칙적인 붓질을 반복해 수직의 움푹한 이랑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작고할 때까지 진행됐던 묘법 연작은 자연 속에서 찾은 형태와 색채로 끝없이 진화했다.
작고할 때까지 진행된 묘법 연작은 전통적인 재료인 한지(한국 전통 종이), 이랑 형태의 긴 선(‘산’), 그리고 작가가 자연 속에서 찾은 형태와 색채가 사용되며 수차례 진화해 왔다. 박서보 작가는 이번 협업을 통해 자연의 색채를 도자기의 영속성에 담아내고자 했다. 베르나르도 제공.

박서보 작가는 자연의 색채를 도자기의 영속성에 담아내고자 했고, 베르나르도는 원작의 섬세한 선이자 이랑을 부조 작업을 통해 충실히 재현하고 작가가 자연에서 얻은 색채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3년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첫번째 ‘묘법 No.1-23′은 제주도의 수평선을 보고 물 같기도 하늘 같기도 한 색을 만든 것인데, 이 색채를 ‘공기색’이라고 이름 붙였다. 두번째 묘법 ‘No.2-23′은 선물로 받은 올리브가 와인과 너무 잘 어울려 그 매력에 푹 빠져 잘 익은 올리브의 색에서 어릴 때 놀던 보리밭을 떠올렸고, 작가는 이 올리브색을 수확의 색이라 표현했다. 박서보 작가의 묘법은 단색화이지만 단색이 아니고, 선이지만 선이 아니기도 하다. 그의 단색은 자연의 빛처럼 입체적이며 복합적이고 보는 각도와 빛의 반사에 따라 홀로그램처럼 번지고 음영을 발산하며, 선은 또한 움푹 패인 이랑의 굴곡에 의해 시선의 흐름에 따라 물결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오묘함과 미세함을 고스란히 재현하기 위해 베르나르도의 장인이 혼신을 다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번 박서보 아티스트 에디션 공개를 위해 베르나르도의 5대 계승자가 방한했는데, “3년간 제작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박서보 작가가 함께하지 못해 슬프다”며 “박서보 작가와 협업한 아티스트 에디션이 더 많이 알려질 수 있도록 유럽,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까지 열심히 알리겠다”고 전했다.
베르나르도는 원작의 섬세한 선을 부조로 충실히 재현하고 작가가 추구한 색채의 힘을 전달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고, 올해 11월 협업을 시작한지 3년 만에 국내에서 최초로 아티스트 에디션을 공개했다. 베르나르도 제공.

박서보 작가는 지난해 루이 비통의 ‘아티카퓌신 컬렉션’에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루이 비통은 2019년부터 매해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와 협업해 ‘아티카퓌신’ 컬렉션을 선보여왔는데, 한국인 예술가로는 박서보 작가가 최초였다. 작가의 대표적인 묘법 중 2016년작을 루이 비통의 ‘카퓌신’ 가죽에 붓질 효과를 낸 3D 고무 사출 작업을 통해 묘법만의 독특한 질감과 형태를 재현해냈다. 박서보 작가는 ‘아티카퓌신’을 위해 2년여 걸쳐 열정을 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서보 작품을 포함한 ‘아티카퓌신 백’ 22점은 소더비 특별 자선 경매에 올려졌고, 수익금은 모두 작가가 선정한 비영리단체에 기부됐다. 박서보 작가의 백은 2만2860유로(약 3255만원)에 낙찰됐고, 작가의 뜻에 따라 ‘국경없는의사회’에 기부됐다.
박서보 작가는 지난해 한국 예술가 최초로 루이 비통 ‘아티카퓌신 컬렉션’에 참여했다. 작가의 대표 연작 ‘묘법’ 중 2016년 작을 기반으로 디자인된 것으로 카퓌신 가죽에 붓질 효과를 낸 3D 고무 사출 작업을 통해 독특한 촉감과 질감을 완성했다. 루이 비통 제공.

박서보 작가는 “예술은 일상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의 캔버스는 세라믹이 되고 가죽이 되기도 하며 세계적인 패션과 리빙 럭셔리 브랜드들을 통해 전세계로 전달되었다. 박서보 작가가 92세까지 멈추지 않고 남긴 이러한 행보들은 의미가 있다. 이 거장의 작품을 재현하고 알리기 위해 고고한 헤리티지를 자랑하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혼신을 다하는 변화는 다음 세대 한국 작가들의 미래 유산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디올은 브랜드의 아이코닉 백 ‘레이디 디올’을 한국 작가 22인과의 협업 작품으로 선보이는 대규모의 ‘레이디 디올 셀레브레이션(Lady Dior Celebration)’ 전시를 펼치기도 했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작가들과 전통 깊은 장인 정신에 뿌리를 둔 세계적인 브랜드들과의 협업이 무한해질 것을 기대하게 된다. 쿠사마 야요이와 루이 비통의 협업처럼, 한국 작가의 협업 작품이 뉴욕, 파리, 밀라노의 명품 스트리트를 도배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지난 9월 디올은 디올 성수동 컨셉 스토어에서 브랜드의 아이코닉 백 ‘레이디 디올’을 한국 작가 22인과의 협업 작품으로 선보이는 대규모의 ‘레이디 디올 셀레브레이션(Lady Dior Celebration)’ 전시를 진행했다. 디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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