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야드에서 펼쳐진 한 해의 드라마, 와인 빈티지
  • 안미영 와인21 편집장
입력 2023.10.13 09:20

와이너리의 셀러에 보관 중인 올드 빈티지 와인들

한 병의 와인이 탄생하기까지는 수많은 요소가 개입한다. 포도 품종과 토양, 기후, 재배 조건과 양조기술, 와인메이커의 스타일까지, 와인에 ‘차이’를 만드는 요소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와인메이커들이 첫손가락에 꼽는 것은 당연히 ‘좋은 포도’다. 무엇보다 원재료가 좋아야 한다는 의미다. 포도 작황은 해마다 그 해의 기후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그 결과는 와인의 품질과 생산량에 영향을 미친다. 작황이 좋은 해에는 중저가 와인에서도 기대 이상의 품질을 기대할 수 있고, 좋은 포도로 만든 고급 와인은 구조감이 뛰어나며 숙성잠재력도 높다. 우리가 와인을 구입할 때 레이블에 표기된 ‘빈티지’를 확인하는 이유다.
올해 포도 수확을 앞둔 토스카나 지역의 빈야드 풍경

빈티지란 와인이 탄생한 해를 의미한다. 2023년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은 2023 빈티지 와인이 되는 것이다. 양조 후 와이너리에서 꽤 오랫동안 숙성 기간을 거쳐 출시되는 경우에는 소비자를 만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지만, 레이블에는 포도를 수확한 해의 빈티지를 표기한다. 간혹 빈티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와인은 여러 해에 생산된 포도를 사용한 논 빈티지(Non-Vintage) 와인이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저렴한 와인의 경우 특정 해의 포도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빈티지를 표기할 수 없다. 반대로 고가 와인 중에도 여러 빈티지를 섞어 와인을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고급 스파클링 와인을 대표하는 샴페인이 그렇다. 샴페인 생산자들은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양조한 와인을 보관해둔 리저브(Reserve) 와인을 섞는다. 포도 작황이 아주 뛰어난 해에는 그 해에 수확한 포도만으로 샴페인을 생산하는데, 이런 ‘빈티지 샴페인’은 숙성 기간이 더 길고 가격도 더 높은 프리미엄 와인으로 출시된다.
와인애호가들은 9-10월이 되면 여러 와인 생산국의 포도 수확 상황을 궁금해하며 생산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좋은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늦가을과 봄 사이에 적당한 비가 내려야 하고 여름에는 일조량이 풍부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그런데 중요한 생장기인 6-7월에 많은 비가 내리거나 습한 날씨로 인해 곰팡이 피해를 입는다면 수확량과 와인 생산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저가 와인이라면 굳이 빈티지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지만 고급 와인이나 올드 빈티지 와인을 구입할 때는 빈티지 차트를 살펴보며 해당 빈티지가 전문가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선택하는 것이 좋다. 뛰어난 ‘그레이트 빈티지’로 알려진 해에 생산된 와인은 동일한 와인이라도 가격대가 다른 해에 비해 훨씬 높게 책정돼 있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 1988, 1996, 2003, 2009 빈티지

동일한 와인의 여러 빈티지를 한자리에서 비교해 보는 흥미로운 시음회도 있다. 빈티지별 차이를 확인해볼 수 있는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인데, 최근 국내에서 개최된 다양한 와인 행사 중에는 평소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버티컬 테이스팅도 있었다. 소위 보르도의 ‘5대 샤토’ 중 하나이자 위대한 와인으로 손꼽히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Château Lafite Rothschild)의 2009, 2003, 1996, 1988 네 가지 빈티지를 함께 테이스팅한 것이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와인이 보여주는 너그러움과 깊은 풍미부터 2009년 빈티지의 견고함까지, 네 가지 와인 모두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성으로 뚜렷한 캐릭터를 보여줬다.
올해 포도 수확을 앞둔 토스카나 지역의 빈야드 풍경

흔히 빈티지에 따른 영향을 크게 받는 곳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의 구대륙 생산국이고, 미국과 칠레 등 신대륙 생산국들은 기후가 안정적이기 때문에 빈티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신대륙 와인은 빈티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구입해도 일관된 맛을 기대할 수 있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구대륙에 비해 편차가 크지 않을 뿐, 신대륙 와인에도 빈티지 차이가 존재한다. 실제로 신대륙 와인메이커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빈야드에서 매년 확연히 다른 기후를 겪고 있다고 한다. 오직 상업적인 목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와인이라면 다른 이야기지만, 장인정신으로 포도가 생산되는 땅과 환경을 와인에 담아내고자 하는 생산자들은 빈티지에 따라 다양한 대처방식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세계 곳곳의 포도원에는 기후변화로 인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더 자주 펼쳐진다. 잦은 산불 외에도 극심한 가뭄이나 폭염, 서리 피해, 갑작스러운 폭우 등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데, 매년 다른 조건이 주어지기 때문에 다음해를 예측할 수도 없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은 2015년과 2016년 이상적인 조건에서 아주 훌륭한 와인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어진 2017년은 정반대로 포도재배에 어려움을 겪었고 생산량도 줄어들었다. 그 해에는 키안티 클라시코의 최고 등급인 ‘그란 셀레지오네’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기본급 와인만 만든 와이너리들도 있었다.
와이너리에서 숙성 중인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와인

와이너리에서 숙성 중인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와인

생산자들은 포도가 좋은 해에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와인을 만드는 반면, 그렇지 않은 해에는 난이도가 높고 도전적인 상황에 놓인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역사상 손꼽을 만큼 최악의 빈티지로 기록된 2013년은 와인의 품질에 대해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해였다. 그런데 이후 2013년 빈티지의 보르도 와인이 출시됐을 때는 예상보다 괜찮다는 반응이 있었고, 장기 숙성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시음 적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마시기에는 좋다는 평가도 많았다. 보르도 2013 빈티지에는 지금도 여전히 ‘망빈(망한 빈티지)’이라는 표현이 따라다니지만 어렵고 도전적인 상황일수록 생산자들이 양조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빈티지이기도 하다.
와인을 마시며 빈티지별 차이를 경험할수록 실감하게 되는 것은 와인이 자연에서 오는 술이라는 사실이다. 기후환경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니, 사람이 할 일은 주어진 자연의 조건 안에서 최대한 좋은 와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재배한 같은 품종의 포도를 사용해도 지난해나 다음해와는 다른 와인이 탄생한다. 바로 그 해의 빈야드에서,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펼쳐진 드라마가 깃든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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