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EZE SEOUL 2023 ‘프리즈(Frieze) 서울’ 브레게

안 그래도 뜨거웠던 9월 서울 한복판을 더욱 뜨겁게 달궜던 글로벌 아트페어 2023 ‘프리즈(Frieze) 서울’.
세계적인 예술 작품을 배경 삼아 삼삼오오 샴페인이나 차를 나누며 외국 갤러리 대표들이나 아티스트들과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넷플릭스 영상 속 한 장면에 와 있는 듯 했다.
지난해처럼 오픈 전부터 똬리에 똬리를 틀고 문이 열리기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모습은 줄었지만 마치 수십년 동안 이 축제를 즐겨온 것처럼 다들 너무나도 자연스레 부스를 유영하고 있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배움이 되는 우아한 시간.
과거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문화 유산이 풍부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를 다니며 안목과 식견을 넓힌 ‘그랜드 투어’가 따로 없다. 일부러 돈 들여 해외 나가지 않아도 쉽게 보기 힘든 수만 점의 작품들이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예술을 즐기러 온 예술 애호가들과 대화를 나누며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역시 짚어볼 수 있으니 땀흘리지 않는 ‘체험 삶의 현장’이다.
육체적 땀 대신 물론 언어 장벽 때문에 손짓 발짓하며 진땀을 흘릴 순 있겠지만, 예술 앞에 언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숭고한 아름다움을 즐기는 건 마음이 해낸다.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없이 눈빛 만으로도 감탄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천재성, 천재적인 신진 아티스트와 만나 꽃피다.

지난해의 폭발적인 호응 덕인지 이번 프리즈 서울엔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참여도 활발했다. 무엇보다 MZ세대 유망 작가들을 대거 발굴해 적극적으로 협업한 것도 눈에 띈다. 지난 17일까지 서울 성수동 컨셉스토어에서 레이디 디올 셀러브레이션을 선보인 프랑스 패션 하우스 디올은 한국계 캐나다 작가인 제이디 차(40),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조각가이자 예술가인 윤예섬(28) 등 작가들과 손을 잡았고, 스위스 하이엔드 워치메이커 브레게는 독특한 시선의 회화 작가 정희민(36), 미디어 아티스트 안성석(38) 등을 세계의 무대 위로 한 껏 올렸다.
브레게는 특히 프리즈 서울의 공식 글로벌 파트너로 수준 높은 협업 전시 ‘스트리밍 타임(Streaming Time)’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브레게와 손잡은 정희민 작가의 경우 이번 프리즈 서울 기간 동안 세계적인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의 새로운 전속 작가로 발탁된 소식을 함께 알리며 또 한 번 주목을 받기도 했다. 브레게는 지난 5월 프리즈 뉴욕에서 시간에 대한 협업 전시로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 세계적인 아트 전문지 아트넷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한국인 독립 큐레이터 심소미와 함께 시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일깨웠다.
지난 6일 저녁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만난 심소미 큐레이터는 젊은 작가를 발탁한 배경에 대해 “천재적인 발명가이자 시계 기술자이며 아티스트였던 창업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1747~1823)가 남긴 유산 그 자체가 역사를 바꿔놓을 만한 예술 작품 못지 않다”면서 “대단한 창의력으로 세상을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봤던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에너지를 신진 아티스트의 눈을 통해 새삼스레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천문과 과학에도 능했던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현 시대에 되살아나 예술성을 발휘했다면 보는 이들을 깜짝깜짝 놀래키는 이들 젊은 작가들의 참신한 시선과 궤를 같이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명품 브랜드가 아티스트와 협업 하는 건 당연하기까지 느껴지지만, 이처럼 자신만의 정신 세계를 간직하며 서로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선사하는 협업은 드물다. 최근에 만난 최고의 협업 중 하나였다. 시간을 뛰어넘는 천재성의 만남은 브레게 본사 관계자들은 물론 프리즈 서울 관계자들까지 양손 엄지를 번쩍 들어보이게 했다. 이들 작가들의 겸손하면서도 재기 발랄한 눈빛은 250년 전 시간과 보이지 않는 분투를 벌이며 새로운 발명에 대한 환희를 만끽하는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모습을 유추하게 했다.
◇스트리밍 타임, 시간이 지닌 새로운 면


스트리밍은 끝없는 흐름을 뜻하는 단어이자, 오늘날의 디지털 문화와 긴밀히 연결된 문화 소비 방식의 한 형태다. 5월 프리즈 뉴욕에서 오비탈 타임(Orbital Time)을 주제로 전시회를 선보였던 심소미 큐레이터는 이번 테마를 통해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간의 문제를 다뤘다. 즉 모두에게 다르게 느껴지는 주관적 경험인 동시에 서로 연결된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은 ‘시간’을 파고 든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탐구하는 스트리밍 타임은 현대 사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문화적 시간을 의미한다. 전 세계적으로 서울이라는 도시가 대변하는 스트리밍 문화를 연상시키고 또 이에 부응하는 테마이기도 하다. “예술에는 도시 생활이 인간의 지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가 반영돼 있다. 또한 예술은 사회에서 보이지 않거나, 배제되거나, 소실되었을지 모르는 것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번 협업에서는 워치메이킹 분야의 발명과 발전 속 브레게의 중요성을 고려해 이를 예술, 그리고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워치메이킹 분야에 대한 폭넓은 이해 간의 대화로 표현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심소미 큐레이터)
심 큐레이터는 이번 아티스트 선정에 대해 “안성석·정희민 작가는 지각과 관련하여 시간이라는 개념에 도전장을 내민 한국의 차세대 아티스트”라면서 “두 아티스트 모두에게 있어 현대의 시간은 사회, 지각, 구체화, 관습, 계층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활용된다”고 말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아티스트 안성석, 정희민은 오늘날 시간의 개념을 표현하는 방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움직이는 방식을 탐구하는 이들의 작품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모두와 동일한 방식으로 시간에 순응해야 하는 부담감을 극복하게 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인가.


미디어 아티스트인 안성석은 주로 디지털 이미지 및 영상을 활용해 현실을 관찰하고 보존하는 기억 장치로서의 게임과 가상 현실을 탐구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현대의 불안과 위기로 인해 그 존재가 흐릿해진 층위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안성석 작가가 선보이는 비디오 월(wall) 설치 작품과 디지털 사진에 묘사된 사람들은 한 반구에서 다른 쪽 반구로 모래가 움직이면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모래시계 속에 살고 있다”면서 “그의 작품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과 흐르는 시간의 불확실성,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던지는 중요한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려는 사회의 무게감을 탐구한다”고 말했다. 안성석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알람이 울리고 있습니다. 멈춰진 적이 없는 알람이죠. 알람이 울리는 게 분명한데도 이를 끄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끄고 싶어도 끌 수가 없습니다. 귀를 기울여 보면, 이 소리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스트리밍 타임은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우리 곁을 쏜살같이 스쳤다가 아무런 예고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지만 그 뒤에 남겨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역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정희민 작가의 경우 스크린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시간과 감각의 불일치를 묘사하는 회화 작품을 통해 오늘날의 기술 매개 사회에서의 자기 정체성 문제, 그리고 디지털 문화가 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얘기한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정희민 작가는 ‘부서진 배 위의 세이렌 아네모이아’라는 제목의 회화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라면서 “그녀는 일시성을 매개로 활용하는 화가로서 소재를 중심으로 한 섬세한 작업 과정을 통해 디지털과 아날로그, 그리고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를 자유로이 유영한다”고 말했다.
정희민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과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에서 우리의 몸이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회화 작품에서 시간이라는 매개를 통해 형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면서 반복적인 실패라는 개념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패로 인해 옴짝달싹 못 한다고 느끼기보다는 시간이 우리의 몸을 통과하고 난 뒤에 무엇이 남는지를 자각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