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만 최고가 아닌… 항공 시계의 전설, 그 70년 역사
입력 2023.06.30 10:39

올해 70주년을 맞은 브레게의 타입 XX 컬렉션. 70년전 오리지널 타입 XX의 군용 버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타입 20 크로노그래프 2057와 민간용 버전을 재해석한 타입 XX 크로노그래프 2067를 선보인다. /브레게 제공

현란한 수식어를 뒤로 하고, 쉽게 표현해보자면 이렇다. 전국 상위 0.1%의 우등생이 작정하고 공부해서 완성한 답안지 같다는 것. 탄탄한 기초 덕에 ‘아는 대로’ ‘배운 대로’ 답안을 작성해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좋은 점수를 받을 인재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풀이법을 내놓은 느낌이랄까.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다른 설명을 곁들여보자. 예를 들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특별 조리법(레시피)으로 수많은 단골을 보유한 맛집 주인이, 트렌디한 조리법을 내세운 신흥 맛집들의 고객 몰이에 ‘보란듯이’ 내놓은 신규 메뉴를 보는 느낌! 가문의 비법이 담긴 레시피에 최신 트렌드를 더해 명실상부 ‘줄서서 먹는’ 식당의 자존심을 되새긴 것이다.
스위스 최고급 시계제조사 브레게(Breguet)가 최근 발표한 ‘타입 XX’를 두고 떠오른 생각이다. 파일럿 워치(항공 시계)로 분류되는 타입 XX는 지난 70년 동안 브레게의 대표적인 컬렉션으로 사랑받았다. 수많은 마니아를 양산했던 ‘타입 XX’ 라인이 이번에 4년여의 개발 끝에 완전히 새로운 칼리버를 장착한 ‘4세대 타입 XX’로 재탄생했다. 1950년대 선보였던 1세대 모델에서 영감을 받아 초창기 전통과 스타일을 상당 부문 따르면서도 기술적으로 더욱 진화했다. 당시 프랑스 공군 및 해군항공대에 납품된 군용(military version)인 ‘타입 20′과 이를 바탕으로 일반 고객들을 위한 민간용(civilian version) ‘타입 XX’로 나뉘어 선보였다.
브레게는 이번 대대적인 론칭 행사의 장소로 프랑스 파리를 택했다. ‘타입 XX’의 역사성과 그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380명의 VIP와 기자, 업계 관계자들은 신제품을 보는 데 앞서 파리 르 부르제 항공 박물관을 방문했다. 브레게 비행기들을 비롯해 다양한 비행기들이 전시된 곳이었다. 브레게가 단지 파일럿 워치를 내놓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항공기도 제작했던 브레게 가문 DNA를 다시금 알리는 장이 됐다. 항공 시계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제품군 중 하나로 꼽히는 타입 XX. 항공 산업 발전의 여정에 따라 자연스레 탄생한 역사적·시대적 산물이었다.
파리 르부르제(Le Bourget)에서 열린 타입 XX 팝업 전시장. /브레게 제공

◇시계만 최고가 아니다. 프랑스 항공 산업을 주도한 브레게 DNA
브레게가 어떤 곳인가. 한 두개 대표 제품라인으로 ‘업계의 포식자’로 군림한 최상위급 시계 제조사들 사이에서 수많은 특허를 통해 다양한 제품군을 히트시키며 ‘시계 맛집’으로 불린다. 시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이자 ‘시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창업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1747~1823)의 정교한 기술력과 우아한 관점을 닮은 제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브레게라는 브랜드가 자기계발서를 썼다면, 거의 매년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 상단을 차지했을 것이다.
브레게 가문은 시계 제조 뿐만 아니라 항공업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하우스의 창립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5대손이자 항공기 디자이너겸 개발자인 루이 샤를 브레게(Louis Charles Breguet·1880-1955)가 1911년 설립한 ‘루이 브레게 항공 공방’(일명 브레게 에비에이션)을 통해 항공기 제조 분야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루이 샤를 브레게는 헬리콥터의 전신인 자이로플레인 등 다양한 항공기를 설계하는 등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다. 군용 항공기도 제작했다.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당시, 루이 브레게가 이끄는 연구팀이 ‘브레게 14′라는 정찰기이자 경폭격기를 개발했다.
복엽기(날개가 위아래로 2쌍씩 달려있는 비행기) 구조로, 적의 추척을 피하는 6000m 고도 비행이 가능했다. 거의 8000개가 제작돼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하면서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15개 국가에 판매됐다. 프랑스 작가 앙투안 생텍쥐베리 작품에도 등장할 정도로 시대를 풍미했던 정찰기다. 브레게 14는 생텍쥐베리 소설 속 주인공 어린왕자와 함께 프랑스 지폐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더 진보한 브레게 19를 전세계 항공사에 납품하는 등 브레게는 곧 프랑스 항공 기술력 발전의 상징이 됐다.
즉 ‘브레게’라는 이름을 달고 한 곳에서는 최고급 시계가, 또 다른 곳에서는 항공 산업을 일으키는 항공기로 개발돼 전 세계를 누빈 것이다. 다시 ‘타입 XX’로 돌아가면, 여느 브랜드 제품처럼 군납 제품에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브레게라는 브랜드 자체에 깃든 DNA를 바탕으로 두 분야의 교집합이 일궈낸 걸작이다.
/브레게 제공

◇파일럿 워치
인간의 감히 정복하기 힘들어보였던 하늘을 자유 자재로 날게 되면서, 항공 시계는 ‘시계 애호가의 로망’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과거 첨단 계측 장비의 역할을 했던 항공 시계는 비행 기법의 발전에 따라, 이젠 기능적인 목적성보다는 평상시에도 멋스럽게 착용하는 데일리 워치에 가까운 대접을 받기도 한다. 캐주얼한 느낌을 과감하게 연출하고 싶을 때, 멀리서도 한 눈에 딱 알아볼 수 있는 항공 시계로 시선을 압도하는 것이다. 각종 기술력을 과시하기에도 적절하다. 항공용 시계의 인기와 함께 성장한 시계 제조사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인기에 편승하는 것이 브레게의 정신은 아니다. 위대한 발명가인 창업자의 철학에 맞게 브레게 역시 승무원의 안전에 더욱 기여하면서 항공에 더 적합한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진화했다. 브레게 아카이브 연구에 따르면 1930 년대부터는 항공 환경에서만 발생하는 특정한 제약 조건에 맞춘 ‘특수한’ 제품이 줄을 이었다. 19 리뉴(ligne·무브먼스 사이즈 단위/1 리뉴는 0.0888인치(2.2558mm))의 항자성 실버 케이스를 갖춘 비행장 크로노미터,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카운터, 단열 케이스, 온도 조절 장치, 조명을 갖춘 작은 사이즈의 24 리뉴 기내 크로노미터, 사이더로미터와 같은 제품이 다수 등장했다. 모두 군용 항공과 1933년 설립된 프랑스 국영 항공사인 에어 프랑스)에 납품됐다.
1950년대 초부터 브레게는 항공 조종석 계기판을 위한 시계 제조사로도 명성을 떨친다. 가장 잘 알려진 타입 11, 11/1, 12 모델은 수십 개국에 판매되어 수많은 항공기의 조종석 계기판에 탑재됐고, 특히 유명한 건 바로 초음속 콩코드다.
파일럿 워치는 조종사, 더욱 포괄적으로 승무원의 생명줄이라 불려왔다. 승무원들은 비행 시간 또는 중간 비행 시간을 측정하고, 연료 소비를 모니터링하고, 방향을 조정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한다. 안전상의 이유로 조종석 계기판에 있는 크로노그래프를 보조할 수 있는 다른 크로노그래프가 필요했다. 둘 중 하나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나머지 하나에 의지하는 식이었다. 전설적인 타입 XX와 함께 브레게의 전문 분야로 자리잡은 워치메이킹 장비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최초의 타입 XX를 선물받은 자클린 오리올(Jacqueline Auriol)은 여성 비행사 사이에서 국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브레게 제공

◇항공 시계의 전설 타입 XX, 그 70년의 역사
브레게는 1952년 프로토타입을 제시했고, 1953년 항공 기술 서비스로부터 승인 받았다. 타입XX은 프랑스 항공국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1954년 프랑스 공군이 1100피스의 군용 타입 20 모델을 주문하면서 역사는 새롭게 시작한다. 이는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공급됐다. 이 모델에는 30분 토털라이저와 함께 서명이 없는 다이얼이 탑재되었으며, 케이스백에는 BREGUET -TYPE 20 - 5101/54 공식 문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1971년 등장한 2세대 타입 XX는 더욱 큰 사이즈의 폴리싱 처리된 스틸 케이스, 두툼한 러그, 블랙 베젤이 특징이다. 800피스의 타임피스 중 대다수는 민간 고객에게 판매됐다. 프랑스 대통령 또한 공식 선물로 이 타임피스를 구매했다.
1995년 3세대 타입 XX가 레퍼런스 3800 ‘아에로나발’(날짜창이 탑재되지 않은 버전), 레퍼런스 3820 ‘트랜스애틀랜틱’(날짜창이 탑재된 버전)으로 부활했다. 새로운 타입 XX는 항공 분야의 특성을 반영한 기존 모델의 블랙 다이얼, 회전 베젤, 플라이백 기능을 고스란히 보존했고, 편리한 셀프 와인딩 무브먼트가 탑재된 디자인으로 완성됐다. 이는 알람 시계(레퍼런스 3860), 여성용 타입 XX(레퍼런스 4820) 외에도 2004년에는 타입 XXI(레퍼런스 3810), 2010년에는 고진동 기술과 실리콘 소재를 활용한 화려한 디자인의 타입 XXII(레퍼런스 3880)가 등장하면서 전체 컬렉션에 풍성한 매력을 더했다.
파리 프티 팔레에서 개최된 브레게 타입 XX 런칭 현장. /브레게 제공

타입 20과 타입 XX, 당신의 선택은 무엇?
■군용을 복각한 타입 20 크로노그래프 2057
1955년부터 1959년 사이 프랑스 공군에 공급된 1100피스의 타입 20 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마 숫자로 타입 XX라고 기재된 해군항공대 모델을 포함한 여타 모델과는 달리 아라비아 숫자로 제품의 이름인 타입 20이 새겨져 있다. 블랙 다이얼로 타입 20의 정체성은 충실히 유지한다. 아라비아 숫자와 베젤의 삼각형 디테일, 그리고 모든 핸즈는 야광처리된 민트 그린 컬러로 제작됐다. 3시 방향에 위치한 30분 토털라이저는 이제 9시 방향의 60초 토털라이저보다 더 큰 사이즈로 완성되며, 4시와 5시 사이에는 날짜창이 추가됐다.
42mm 스틸 케이스로 3세대 당시 선보였던 38.5mm에서 증가했다. 케이스 두께는14.1mm로 확장됐다. 스틸 케이스에는 과거 공군에 공급되었던 모델과 마찬가지로 인그레이빙 디테일 없이 홈이 파인(fluted) 양방향 베젤이 탑재됐다. 타입 20에서 더욱 눈에 띄는 건 오리지널 모델의 배(pear) 모양을 반영한 크라운. 중립 포지션인 1번, 날짜를 조정하는 2번, 시간을 설정하는 3번의 3가지 포지션으로 조정 가능하다. 2시 방향의 푸셔로는 크로노그래프를 활성화할 수 있고, 4시 방향 푸셔로는 ‘플라이백’ 기능이 활성화된다. 플라이백 기능을 활용하면 정확한 측정을 요하는 다양한 시간과 방향을 손쉽게 다룰 수 있다. 2시 방향의 푸셔는 시계를 시작 및 정지하고, 4시 방향 푸셔는 크로노그래프와 미닛 토털라이저를 초기화한다.
타입 XX 크로노그래프 2067. /브레게 제공

■민간용 버전 복각한 타입 XX 크로노그래프 2067
1950년대 및 1960년대 등장한 최고급 민간용 타입 XX, 특히 1957년에 제작되어 개별 번호 2988 을 부여받은 모델의 직계 후속작이다. 먼저 디스플레이의 경우 3시 방향에는 15분 토털라이저, 6시 방향에는 12시간 토털라이저, 9시 방향에는 러닝 세컨즈가 장착됐다. 아라비아 숫자, 핸즈, 베젤의 삼각형 디테일에는 아이보리 컬러의 야광 코팅을 더했으며, 날짜창은 4시와 5시 방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42mm 스틸 케이스에는 홈이 파인(fluted) 양방향 눈금 디테일 베젤이 탑재됐다. 직선 형태의 클래식한 크라운은 중립 포지션인 1번, 날짜를 조정하는 2번, 시간을 설정하는 3번의 3가지 포지션으로 조정 가능하다. 2시 방향의 푸셔는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시작 및 중단하며, 4시 방향의 푸셔는 잘 알려진 ‘플라이백’ 원칙을 기반으로 크로노그래프를 즉시 초기화 및 재시작한다.
새로운 크로노그래프 제품은 카프스킨 스트랩 외에도 블랙 나토 스트랩이 케이스 내에 추가로 제공된다. 또 항공기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하바나 컬러의 가죽 소재 프레젠테이션 박스에 담겨 출시된다.
■퀵체인지
이번 제품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다. 브레이슬릿 교체 시스템을 활용하면 별도의 도구 없이 손쉽게 가죽 스트랩을 분리할 수 있다. 러그 아래에 있는 조정 장치를 누르기만 하면 다이얼 양쪽의 스트랩을 모두 분리할 수 있다. 다른 가죽 스트랩을 장착하려면 스트랩 상단 끝부분에 있는 슬롯을 시계 러그와 평행한 높이로 45도~60도 각도로 배치하면 된다. 블랙 나토 스트랩의 경우 케이스 아래에 스트랩을 통과시켜 두 바 사이에 밀어넣으면 된다.
■새로운 칼리버 728
이번 신제품은 4년의 개발 과정 끝에 민간용 버전을 위한 셀프 와인딩 칼리버 728, 그리고 군용 버전을 위한 칼리버 7281을 선보였다. 밸런스 스프링, 이스케이프 휠, 팰릿 레버 혼은 실리콘 소재로 제작돼 정밀 시간 측정을 의미하는 크로노메트리 분야의 최신 기술로 구현했다. 실리콘 소재는 내식성과 내마모성이 뛰어나고 자기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시계의 정확성을 높여 준다. 60시간의 파워 리저브.
투명 사파이어 크리스탈 케이스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뒷면도 놓칠 수 없다. 블랙 DLC 코팅 처리한 컬럼 휠과 항공기의 날개를 닮은 형태에 브레게 로고가 인그레이빙된 블랙 컬러의 로터가 항공 시계라는 디테일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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