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과 외면 모두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향하면서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지원할 생각”
입력 2023.06.30 10:22

한국작가 8인 파리 특별전 기획한 시슬리 크리스틴 도르나노 부회장 “3년전 열린 아트페어에서 한국작가들에 매료

프랑스 파리 개선문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트루아 아브뉴 드 프리들랑드(3 Avenue De Friedland). 관광객이 북적대는 파리 8구 샹젤리제 거리와 평화로운 자연 광경이 일품인 몽소 공원 사이에 위치한 고즈넉한 곳이다. 아브뉴 드 프리들랑드(프리들랑드 거리)는 1807년 나폴레왕 1세가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한 프리들랑드 전투에서 이름을 딴 지역으로, 프랑스 대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가 한 때 거주하며 이름나기도 했다. ‘승리’의 기운과 프랑스 특유의 자부심이 배어있달까. 관광지를 빠르게 점유해버리는 이방인들보다는 주로 현지인들로 채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 작가 기획전을 주도한 시슬리의 크리스틴 도르나노 부회장.

그러한 이 곳에서 한국 작가들 특별전이 열린다고 했다. 재불작가 2인 포함 한국 작가 8인의 특별 기획전 ‘부분의 합: 회복과 결속(Somme des Parties : Récupération et Unité)’이다. 지난 8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이번 전시회의 주관사로 등장한 건 ‘trois-cinq friedland(트루아 상크 프리들랑드)’. 프리들랑드 3-5번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명칭이었다. 함께 주관사로 등장한 주프랑스 한불상공회소와 갤러리엠나인은 이름만 봐도 한국과의 연관성을 금방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트루아 상크 프리들랑드’라니? 포스터에 오른 로고에도 ‘트루아 상크 프리들랑드’라는 글자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건물 주소라는 것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도 앱을 따라 도착한 그곳. 건물의 대형 통유리창 밖으로 지나는 이들을 발걸음을 붙잡는다. 한 지역 주민은 “힘이 넘쳐보이는 물결의 에너지가 깊이 있는 색감과 어우러져 대번에 눈길을 끌었다”고 말했다. 대형 갤러리처럼 보이는 건물로 들어가고 나서야 그 정체를 알게 된다. 프랑스 고급 화장품 브랜드 시슬리(Sisley) 본사라는 것을. 8만㎡(약 2만4200평)의 9층 건물로, 지하부터 1층에 자리한 갤러리를 포함해 건물 전체가 예술 작품을 담고 있었다.
이번 한국 작가 기획전을 주도한 주인공은 시슬리의 크리스틴 도르나노(50) 부회장. 시슬리의 아트프로그램인 ‘트로아 상크 프리들랑드’를 이끌고 있었다. “3년 전 파리에서 열린 아트페어 ‘아시아나우’를 통해 한국 작가들 작품에 매료됐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굉장한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낸 ‘인간 승리’를 읽을 수 있었지요. 이번 전시회 작품들도 보고 있으면 평화가 절로 느껴집니다. 정신적 회복력을 키워준다고 생각합니다.” 도르나로 부회장은 “역량있는 한국 작가들이 많은데, 더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아쉬웠다”면서 “우리가 직접 나서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트 프로그램 이름에 시슬리를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은 건 가족 경영을 유지하고 있는 시슬리 가문의 의견이 반영됐다. 크리스틴 부회장은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나타낸다”면서 “자랑한다거나 위세를 과시하는 건 우리의 철학과 맞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건강함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지요. 환경 파괴를 막고 개선하는 데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누군가는 이러한 노력을 마케팅으로 이용하고자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린 개인 회사이기 때문에, 일부러 돈을 들여 외부에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면과 외면 모두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향하면서, 저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지원할 생각입니다.”




6월 8일∼27일 프랑스 시슬리 본사에서 열린 특별 기획전에 전시된 한국 작가 8인의 작품들.

2017년 시슬리 아트 프로그램을 선보인 이후 주로 프랑스 에콜데보자르(프랑스 국립 미술학교) 출신 작가 등 전시회를 기획해왔다. 신진 작가들을 후원하면서 유명 갤러리의 전속 작가가 되는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그 순간의 영광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시슬리 아트 재단 측에서 후원한 한국 작가 특별전은 이번이 처음. 1년 여의 기획이 끝에 탄생한 한국 현대미술 작가 8인전에는 재불(在佛)작가인 채성필, 정영환을 비롯해 국내 작가인 서정민, 정해윤, 김덕용, 김남표, 김기주, 김시현 등 신진·중견 작가들의 작품 2~3점씩 걸려있다. 주로 흙, 나무, 한지 등 자연적인 소재를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크리스틴 부회장과 그녀의 어머니이자 창업자 위베르 도르나노의 아내인 이자벨 도르나노가 함께 검토해 작가와 전시 작품을 선정했다. ‘물방울 화가’로 불리는 김창렬 화백의 오랜 팬이라는 두 모녀(母女)는 유명 작가들 작품 뿐만 아니라 서울 홍대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무명의 아티스트 작품을 직접 수소문해 소장하는 등 한국 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키워왔다.
이자벨 도르나노는 “이번 전시 작품들은 전 세계적인 위기로 힘들었던 지난 수년간을 버텨온 우리에게 명상과 숙고, 나눔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틴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동양적 사상을 일깨워준다”면서 “작품 앞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덧붙였다. 여러 작가 작품 중 크리스틴의 눈을 특히 사로잡은 건 서정민 작가의 ‘선(LINES)’ 시리즈. 서예 학원 등에서 폐기되는 한지를 모아 펴서, 말고, 자르고 풀을 먹이는 과정을 거쳐 재료를 만들고, 이를 말아 동심원으로 배열하기도 하고, 여러 열로 차곡차곡 구성하기도 한다. 한 작품에 많게는 1만 5000여개의 한지가 사용됐다. 서정민 작가는 “선 하나가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관점으로 문명의 탄생을 포착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틴 부회장은 “실제로 보니 더 가슴으로 와 닿는 작품들이 많고, 주변 반응도 상당히 좋아서 앞으로 더 이들 작가들의 미래에 대해 기대가 크다”면서 “이번을 기회로 한국과의 접점을 더욱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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