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열린 구찌 크루즈 패션쇼
[What’s new] 경복궁과 구찌의 만남… 한국 유산에 대한 찬사와 미래에 대한 조명
역사에 남을 순간은 항상 해외에 있었다. 밀라노, 파리, 로마, 마라케시, 멕시코시티, 뭄바이…, 그 도시에 대한 연구와 헌사도 거의 해외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 하이라이트 조명이 한국, 서울 한복판을 향했다. 전 세계로 중계되는 순간,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난 16일 서울 경복궁. 14세기 조선 왕실의 ‘안방’이었던 곳이 전 세계 패션의 안방으로 변했다. 트렌드를 주도하는 도시라고 손꼽혀왔던 도시 서울. 과거와 현재를 고스란히 담으며 천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곳. 많은 이들이 알지만, 패션의 공간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곳이 있다. 음악과 함께 비치는 불빛은 세상을 향한 소리없는 외침이었다. 2023년 서울이 전 세계 대중문화의 수도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구찌의 눈으로 세계 곳곳에 알렸다.
◇전 세계 패션계 최초, 경복궁이 열리다
불이 꺼지고 쇼가 시작되자 고요함이 사라졌다. 극적인 음악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궁정 경내를 통해 펼쳐지는 라이트 쇼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찌 스튜디오 팀의 세 번째 컬렉션이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열광적인 북소리에 근정전을 지켜보는 이들의 심장이 요동쳤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슈퍼모델 최소라의 발걸음이 북소리처럼 당당해졌다. 발끝까지 내려온 아우터는 가을겨울 시즌 야외활동을 위해 침낭으로도 쓸 수 있을 듯한 볼륨감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 뉘앙스는 마치 겨울용 한복 두루마기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히 이탈리아 브랜드의 손길로 완성된 작품이지만 기저에 한국식 의복의 감수성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다. 세계 패션계 팬들은 한국 경복궁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겼을 수 있다. 청록과 붉은색의 오묘한 단청, 버선코처럼 날렵한 처마는 여느 재단에서 쉬이 흉내 낼 수 있는 디테일이 아니다. 해외 디자이너들이 우리네 궁의 기둥부터 처마까지 그 독특한 비율에 혀를 내두르는 이유가 있다.
한 브랜드가 이렇게 다른 나라에 대한 지극한 헌사를 밝힌 게 몇번이나 될까. 지난 1998년 국내 첫 플래그십 부티크를 선보인 지 25주년을 맞는 구찌는 서울 한남동에 새롭게 연 두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에 ‘구찌 가옥’이라는 한글 이름을 붙임으로써 한국에 대한 애정을 꾸준히 보여왔다. 이번 쇼가 열린 경복궁 무대는 구찌의 오랜 앰버서더인 카이의 티저 영상을 비롯해 아이유와 신민아, 최근 앰버서더가 되며 세계에 위상을 알린 뉴진스 하니까지 등장해 이미 전 세계에 송출된 바 있다. 구찌 앰버서더로 이름을 올린 카이는 입대 이전 이번 티저 영상을 통해 그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하는 팬들의 갈증을 다소 풀어냈다. 구찌의 인간적 의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구찌 가든 아키타이프 전시는 이탈리아의 구찌 가든과 한국을 연결, 두 나라의 시차를 없애는 역할도 했다. 구찌 디자인에 영감을 준 유서깊은 장소를 담은 목록인 ‘구찌 플레이스’엔 서울 대림미술관이 포함돼 있다. 그 장소에서 지난 2020년 구찌의 또 다른 철학을 엿보는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No Space, Just a Place. Eterotopia’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구찌가 그간 한국을 얼마나 학습했는지, 한국에 대한 깊은 유대를 가진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역사적인 공간을 쇼 무대로 채택해온 구찌는 이번에 경복궁을 런웨이로 구성하면서 한국 문화유산 보존에도 투자했다. 단 한 번의 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해 앞으로 3년간 경복궁의 보존 관리와 활용을 위한 후원도 약속한 것이다.
쇼를 통해 장소를 주목하고 드러내는 것도 전 세계 팬들의 시선을 끄는 데 한몫하지만, 구찌가 보여준 지속적인 관리와 유대는 패션 브랜드가 해당 지역으로 향하는 가장 훌륭한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간 럭셔리 브랜드들이 “소비만 부추긴다”는 등의 지적을 받은 것을 상쇄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구찌 관계자는 “한국은 역사·문화·창의성의 생생한 중심지로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녔고, 구찌 하우스의 핵심 가치에 큰 영감이 되고 있다”면서 “구찌는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국과 한국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경의를 담은 다양한 프로젝트와 이니셔티브를 시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를 통해 지역사회와 패션 산업에 지속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선사하려는 열정을 공유한다”고 밝혔다.
◇구찌만의 감성으로 재해석된 한복 옷고름
한국 정체성에 대한 찬사는 의상으로 해체되고 투영됐다. 구찌는 구찌의 우주를 말하는 ‘코스모고니’ 컬렉션을 지난해 서울에서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 계획이 이번 2024 크루즈쇼로 옮겨지면서, 구찌 디자인팀은 새롭게 디자인 캔버스를 채워야 했다. 이번 쇼는 구찌 코리아 측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한국적 요소와 전통적인 의복 스타일을 연구해 섬세하게 짚어낸 노력이 곳곳에 엿보였다.
이번 컬렉션은 1990년대 후반의 구찌를 연상시키는 실루엣을 2010년대의 컬러 팔레트를 통해 선보인다. 이는 대도시의 패션 스타일에 내재한 세대 간의 코드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포멀한 의상의 소재와 제작 기법이 스포츠웨어와 캐주얼웨어로 교체됐다. 또한, 모든 의상과 룩은 하이브리드 형태로 선보인다.
부클레 스커트 수트, 실크 블라우스, 키튼 힐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스트리트웨어는 한강의 윈드서퍼와 제트-스키어들이 입는 스쿠버 다이빙용 웨트슈트 등 서울의 일상에서 영감 받은 스포츠웨어와 함께 선보인다. 이 중 바디-컨셔스 라인은 지상에서 즐기는 스포츠인 스케이트보드 의상의 볼륨 있는 스타일과 대비를 이룬다.
이번 컬렉션에서 선보이는 하이브리드 스타일은 해체의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탈부착 가능한 슬리브는 액세서리가 되고, 지퍼를 활용해 트라우저를 연출할 수 있다. 봄버 재킷은 이브닝 스커트로 변신하고, 바이커 재킷은 길게 늘어나 코트가 된다. 조형미가 돋보이는 라인에서는 A-라인 드레스와 보우 디자인의 실크 밴드가 적용된 다양한 스타일을 만나볼 수 있다.
구찌에 놀란 건 한국을 소화해 내는 그들의 철저함과 그 사이 정제된 구찌의 스타일이었다. 크루즈 라인 특성상 스포티한 의상은 빠질 수 없었다. 이날 스케이트보드 의상과 스쿠버 슈트를 연상시키는 아이템은 단연 시선을 끌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스트리트 웨어의 연장선상이 아니었다. 구찌가 그동안 강했던 영역이었다. 7년간 구찌를 최정상 브랜드로 되새긴 알레산드로 미켈레 디자이너 역시 한국에 대한 섬세한 복식 연구로 유명했지만, 이번 컬렉션은 그의 빈자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미켈레가 지난해 구찌를 떠난 뒤 디자이너 팀이 완성한 이번 컬렉션은 한국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한국-이탈리아의 영혼의 교집합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 컬렉션은 실루엣과 스케이트보드에서 영감을 받은 지갑에서부터 ‘경복궁’이라고 쓰여 있는 셔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지역 거리 스타일에 대한 미묘한 찬사를 내보낸다. 하우스의 시그니처 디테일인 구찌 웹(Web)이 큰 사이즈로 적용된 아이템들도 선보인다. 이 밖에 한국 아티스트 람한(Ram Han)의 초감각적인 바이오모픽 모티브가 컬렉션 곳곳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냥 보이는 건 모두 계산된 작업이다. 한국 아티스트 람한과의 협업이 돋보이는 의상은 한복을 연상시킬 수 있는 엠파이어 드레스 라인으로 표현됐다. 스케이트 보드 바퀴 사이로는 구찌 로고로 장식된 잇백이 새겨졌다. 일을 하다가 바로 바다로 가서 서핑하고픈 마음을 들게 하는 순간이었다. 패션쇼이지만, 일종의 정신적 도피를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사치가 아니라 정신적 힐링을 구가할 수 있는 순간이란 말이다. 현장에 모인 전 세계 570여명의 유명인사뿐만 아니라 이를 시청한 수억명의 시청자들이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숨 쉴 수 있다는 얘기다. 모자는 프랑스의 작업복 브랜드인 Danton과의 협업을 암시했는데, 이는 구찌가 작년에 팰리스와 그다음 디키와 함께 모험적인 협업을 한 이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열광적인 에너지는 현대적이고 전통적인 한국 의상에 존경을 표하는 의상으로 바뀌었다. 의상의 리본은 한국의 옷고름에서 착안했다. 명확하며, 문화적인 오마주였다. 가슴 위의 두꺼운 비단 띠는 고름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수 아이유와 배우 김희애 등 현장에 참석한 셀럽 일부는 구찌 가방에는 구찌가 초청장으로 제작한 노리개(전통 장식 펜던트)를 달아 그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경복궁 패션쇼에서 구찌의 미래를 읽다
이번 패션쇼는 한 브랜드가 이국적인 이미지의 다른 나라와 결합하는 장면 그 이상이었다. 구찌의 미래를 말하기도 했다. 한층 간결하고 정제되면서도 창의적 변주가 살아있는, 조용한 럭셔리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다는 표식이었다. 탈부착 가능한 소매가 액세서리를 형성하고, 지퍼를 사용하여 변형될 수 있는 바지와 이브닝 스커트로 진화한 야상 재킷으로, 해체 작업도 컬렉션의 주요 부분이었다. 구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단서는 톰 포드의 구찌에서의 인상적인 통치에 대한 끄덕임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크 새틴 블라우스, 미니멀한 홀스빛 클러치는 1995년 톰 포드가 데뷔했던 그 당시를 불러 일으켰다.
싱가포르 패션 매거진 멘즈폴리오는 “경복궁을 런웨이로 택한 건 브랜드의 존재감을 증폭시키는 그 이상의 작용을 한다”면서 “구찌는 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행사장에서 패션계의 고위 인사들에게 크루즈 2024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 자체가 수집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복궁은 한국의 초기 예술과 과학 발전의 중심인 한글의 탄생지였고, 조선 왕조 동안 외국 외교관들과 귀빈들이 초대된 배경을 접목한 것이다. 멘즈폴리오는 “구찌가 최근 몇 달 동안 갈고 닦은 젊고 실험적인 디자인이 드레스와 실루엣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모습을 재확인시켰다”고 평했다. 서울 거리 스타일의 강한 영향력은 그날 밤을 빛낸 역사적인 패션계 선언(statement)이기도 했다. 한국이 소프트 파워의 초강대국이 됐고, 패션 산업의 중심으로 부각됐다는 힘과 자부심의 또 다른 언어였다. 그걸 구찌가 발견하고, 구찌의 입으로 재해석해 전했다. 25년 전 한국에 처음 입성한 구찌가 ‘20대 젊은이’로서 한국에 보이는 열정 넘치는 러브레터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넷플릭스 최고경영자 테드 사란도스가 “한국이 문화적 시대정신을 대표한다”고 언급한 인터뷰로 한국의 위상을 재점검했다. 가디언은 “K 팝과 K 드라마에 이어 전 세계 유수의 브랜드가 한국을 쇼 무대로 삼아 글로벌 시장의 젊은 층과 빠르게 소통하고 있다”면서 “이번 구찌 크루즈 쇼를 통해 구찌 역시 유서깊은 브랜드가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보적인 개념을 보여주면서, 한국이 21세기 대중문화의 수도 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