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Hermès 2023 봄 여름 남성복 컬렉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문구처럼 흔히 쓰이지만 무서운 말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럭셔리 패션업계’에선 말이다. 시즌에 앞서 정기적으로 패션쇼를 열어야 하고 트렌드도 제시해야 한다. 신소재 개발도 하면서, 최근 들어선 ‘탄소중립’ ‘폐기물재활용’ 등 지속가능한 지구 환경 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세대를 아우르기 위해 메타버스·증강현실 같은 첨단 기술과도 친밀해야 한다.
기대는 굴레가 되기도 하고 이겨내야 할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소비자는 냉정하다. 그들의 점점 높아지는 기대치를 충족시키며 심사를 받는 디자이너들은 매번 경연을 치르는 오디션 지원자 같은 운명일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의 아티스틱 디렉터인 베로니크 니샤니앙은 매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도 35년째다. 지난 1988년부터 남성 라인의 지휘봉을 잡은 그녀는 조르지오 아르마니나 랄프 로렌처럼 창업자 디자이너가 아닌 브랜드 디자이너로서는 현재 최장수 현역 디자이너다.
패션계에선 한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3년만 자리를 보전해도 ‘탁월한 재능’이란 수식어를 쏟아내며 ‘살아남았다’는 평가를 받고, 10년 이상 재임하면 거의 브랜드와 동일시되는 정도다. 패션사에 기록될 만한 이력의 소유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패션계에서 30년 넘게, 그것도 ‘최고의 장인 정신’ 브랜드로 꼽히는 에르메스에서, 더군다나 남성복과 액세서리 등을 디자인하는 매우 드문 여성으로서(아니, 럭셔리 패션계에선 여성이 총괄 디자이너인 브랜드 자체가 흔치 않다), 매번 평론가들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내니 그녀의 이름을 다시 새겨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의상의 형태를 왜곡하거나 과장하고, 각종 유머러스한 장치로 연극적인 표현을 통해 대번에 시선을 끄는 스타일도 아니다.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지고 입기 전에는 그녀의 숨은 도전을 읽어내는 게 쉬운 것도 아니다. 그 현장을 확인한 건 지난 3월말 일본 도쿄 우미노모리 수상경기장 (Sea Forest Waterway)에서 열린 ‘에르메스 2023 봄 여름 남성복 컬렉션’에서다. 지난해 파리에서 이미 열린 쇼이긴 하다. 하지만, 코로나로 닫혔던 경계를 넘어서며, 생기있는 아시아를 다시금 조명하기 위해 벚꽃이 찬란한 도쿄의 봄과 만났다.

니샤니앙은 직선의 굴절과 왜곡을 통해 남성복에 내재됐던 규정적 구조가 변용되는 것을 은유했다. 슈트와 재킷으로 통용되는 고전적인 남성복의 형태는 여전히 존재함과 동시에 해체되고, 스포츠웨어와 일상복의 경계도 점차 무너졌다. ‘세련됐다’는 단어의 기준점과 기대감 역시 이전 시대와는 또다르다. 청년 문화의 상징이었던 스트리트 웨어는 실리콘 밸리를 거쳐 부(富)의 대체어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 맞춤 웨딩 정장에 낡아보이는 테니스화로 ‘파격’을 선사했던 팝스타 믹 재거의 선도적인 시도를 눈여겨봤다던 그녀다. ‘멋’이 재해석되는 과정을 예리하게 짚어낸 것이다. 최고급 원단과 고도의 장인정신을 이용해 격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소재와 재단 등을 통해 변화를 꾀했다.
파리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밟았던 격자무늬 무대와 의상에서의 구부러진 격자는 수영장 물을 통해 굴절되는 바닥에서 영감을 받았다. 도쿄에선 수상경기장으로 직관화됐다. 패션쇼가 막을 올린 곳은 지난 2021년 제32회 도쿄 올림픽 카누와 조정경기가 열렸던 장소. 2020년에 열렸어야 할 경기가 코로나로 1년 연기됐으면서도, 폐쇄적으로 치룰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이처럼 개방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곳도 없을 것 같다.
전날까지 주룩주룩 내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쇼의 시작과 함께 물러났다. 물의 정령(精靈)도 쇼를 보기 위해 잠시 객석에 앉았던 것일까. 수영장 타일처럼 장식된 관람석은 도쿄만(東京灣)을 한 눈에 보게 한다. 여름을 주제로, 해양 생물인 해마와 민물 가재가 모델의 캣워크와 함께 펄떡이는 듯 커다란 그래픽으로 옷을 장식했다. 실루엣은 햇빛을 흠뻑 머금은 듯한 새콤달콤한 컬러가 이따금씩 그 화사함으로 색이 물든다. 밝은 태양이 뜨는 듯한 진노란 니트는 흐린 날씨를 물리는 듯 경쾌하게 다가온다. 형태는 투명한 물 위의 파장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고 패턴 위의 선들은 지그재그를 그리며 무한히 퍼져 나간다.
니샤니앙의 위대함은 시대정신을 기울어진 격자로 은유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니트에 반바지, 후드 바람막이에 긴바지 등 평범한 듯 새롭지 않은 듯 보이는 옷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가벼운 윈드 브레이커(바람막이)와 파카는 다소 반짝이는 질감의 PVC로 만들어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테크니컬 새틴 소재로 구현된 제품이다.
이쯤에서 에르메스가 1920년대 남성복을 만들기 시작했던 때로 돌아가보자. 창립자의 손자 에밀 에르메스는 캐나다 여행에서 본 자동차 후드용 지퍼를 의상과 가방 등에 활용하려는 발상의 전환을 한다. 그 순간이 바로 창의다. 에르메스는 프랑스에서 지퍼 사용 독점권을 얻어 이전까지 없었던 생활의 ‘자유’를 더해준다. 단추로 일일이 잠그는 수고 없이도, 잠금장치가 없어 물건이 와르르 쏟아지는 일 없이도 지퍼 하나로 손쉽게 마감할 수 있으니 얼마나 발명 같은 발견인가. 아티스틱 디렉터 니샤니앙은 그 당시의 창작과 응용력을 잇는 등 소재를 연구하고, 정교하게 비율을 고치고 또 고쳐내 활동하기 더 편하고 자유로운 의상을 매번 선보인다.

레모네이드, 멜론, 라일락 같은 파스텔톤 의상은 같은 색상이라도 소재와 질감의 차이를 통해 더 빛을 반사해 반짝이거나 차분해진다. 경쾌하고 밝은 색감부터 가벼운 소재까지 보는 이, 입는 이를 들뜨게 만든다. “휴일에 관한 모든 것”과 “가볍고 재미있는 팝 컬러를 통해 자연을 즐기는” 니샤니앙의 의도가 제대로 통한 듯 보인다. 구부러진 격자는 촘촘하게 패턴화돼 셔츠로도 변용되고, 대형 버킨에도 적용된다.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고,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견고하고 다양한 인종과 체형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삶은 쇼의 연장선상이다. 이날 쇼 장 밖에 세워진 실내공간에서 행사는 계속 이어졌다. 그래픽 아티스트 요시 로텐이 재디자인한 공간은 컬렉션의 아쿠아 빛 색조가 곳곳에 스며들어 완전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조명은 대형 물방울이 후광으로 연출된 가재와 해마가 프린트된 룩들과 액세서리의 패턴을 비춘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왜곡된 모자이크는 변화하는 실루엣의 라인을 연상시킨다. 아티스트 루씨의 라이브 공연과 함께 비트는 형광색 기호로 변신한다. 일렉트로닉 사운드 위를 표류하는 퍼커션 소리와 함께 메디 케르쿠쉬가 이끄는 댄서들은 매혹적인 수중 안무로 열정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움직임을 선보인다. 그들의 퍼포먼스는 마치 파도처럼 굴곡을 이룬다.
미국 뉴욕타임스 평가대로 니샤니앙은 “정교함을 위해 즐거움을 희생하거나 즐거움을 위해 정교함을 희생하지 않도록” 한다. 그녀 특유의 엄격함은 ‘적당’이란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때의 유행보다는 장인정신에 더 가까운 그녀의 의상은 수백번 수천번의 탈고와 교열을 통해 원고를 작성하는 것처럼 ‘더 잘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려 애쓴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창작의 자유’에서 나온다고 한다. 30여년 전 그녀가 에르메스로 터를 잡으며 들었던 그 말, “원하는 대로 하라”는 그녀를 여전히 누구보다도 더 엄격하고 더 나은 모습을 찾아내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