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유 블라지의 예술적 폭발력, 서사시 같은 3부작 ‘퍼레이드’에… 그의 의상은 ‘보이는 대로 믿지 말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다
입력 2023.03.24 10:13 | 수정 2023.07.07 16:44

보테가 베네타 2023 겨울 컬렉션

시작은 조용한 경탄이었다. 평범한 듯 보이는 의상의 재료를 모두 바꾸며 상상을 뒤집어 놓는 디자이너의 발상에 패션 평론가들은 무대가 끝난 뒤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확신의 찬사였다. 시즌 1,2 등으로 이어지는 OTT드라마 시리즈처럼 시즌 1의 스토리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창작자가 보여줄 수 있는 기교와 패턴, 기술력, 미적 감각 모두를 쏟아냈다. 미술 작품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만난 것 같은 예술적 폭발력이었다. 세번 째는, 아마 현장에서 봤다면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하지 않았을까 싶다. 혹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하며 밑바닥부터 솟구쳐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완벽한 작품을 봤을 때의 그 충격의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수식어를 집어 넣어도 표현해내는 게 부족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순간. 저절로 일어나 박수를 보내는 본능적인 반사 감각 외에는 이 천재적인 디자이너에 대한 찬사를 어떤 방식으로 보내야 할지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마티유 블라지는 변형과 변주, 움직임을 통해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구현하는데, 이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스루 슈미즈 드레스를 입고 마치 양말처럼 보이는 레더 스트립으로 뜬 부츠를 매치한 네추럴 홈웨어 룩부터 스타일과 격식을 중시하는 이들을 위한 나파 레더에 실사로 프린트한 핀 스트라이프 패턴 셔츠 그레이 플란넬 파자마 룩까지 다양하게 제시된다.
◇마티유 블라지의 이탈리아 3부작
패션을 공부하거나 패션에 관심 있는 이가 아니더라도 이 남성의 쇼는 꼭 봐 줘야 할 것 같다. 이탈리아 럭셔리 하우스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 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된 뒤 지난 2월 말 세 번째로 선보인 ‘2023 겨울 컬렉션’은 마치 단테의 신곡 같은 장편 서사시의 마지막 장을 덮는 느낌이었다. 그는 데뷔 시즌인 2022 겨울 컬렉션부터 2023 겨울 컬렉션에 이르기까지 3부작에 걸쳐 선보인 ‘이탈리아’에 대한 헌사를 담아낸 여정을 마치며, 그의 디자인 철학이자 신념인 ‘크래프트 인 모션 (Craft in Motion)’을 통해 이탈리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찬사를 이어갔다.
디자이너들은 옷으로 말을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의상을 통해 마치 소설 같은 서사를 완성할 수도 있는 가 싶었다. 첫번째 컬렉션이자 시즌 1이 그의 생각과 대본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시즌 2는 이를 확대하고 등장 인물을 대폭 늘려가며 복선을 심어놓는다면 이번 세번째 컬렉션은 그의 미학적 완성도와 재단에 대한 감각, 예술적 시각, 기능성의 전환 등 모든 것을 한 편에 녹여 놓는 완결판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최고의 패션을 선보인 이가 근래 몇이나 될까.
그가 첫 시즌 사람들을 놀래킨 건 가장 평범하면서도 대중적인 청바지와 셔츠를 통해서였다. 삐딱하게 봤다면 ‘저것도 패션이냐’고 했을 법한 의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죽을 전문으로 하는 하우스의 DNA에서 영감을 끌어냈다. 청바지는 우리가 아는 그 청바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벅 가죽으로 된 바지였다.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가 3부작에 걸쳐 공개한 2023년 겨울 컬렉션./보테가 베네타 제공
마티유 블라지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럭셔리이다. 착용자만이 그 진가를 알아보는 것. 특히 진, 화이트 셔츠, 탱크탑으로 이루어진 이 룩들은 옷장을 채우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이다. 지금의 패션은 모두가 언제나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하고 강렬함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이 기본 아이템에 브랜드의 정수를 담은 보테가 베네타 핸드백 하나만 더하면 당신은 바로 보테가 베네타의 일부가 된다. 나는 이 첫번째 룩들을 통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룩을 보았을 때 굉장히 심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이 바지를 만드는 데에만 무려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장인정신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매우 정밀한 작업이지만 결과물은 매우 심플하다. 결과물이 꼭 화려할 필요는 없다.”
그는 이번엔 ‘퍼레이드’를 내세웠다. “스트릿의 신비한 힘은 ‘다름’에서 옵니다. 당신은 누구를 만날까요? 길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까요? 누가 당신을 놀라게 할까요? 예상하지 못한 만남에서 오는 놀라운 순간들은 중요합니다.” 거리는 평등하다. 거리를 거니는 이들에게서 계급을 찾아 볼수는 없다. 각각의 요소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으며, 행진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고대 로마 시대의 청동 조각상 ‘러너(Runner)’부터 화가이자 조각가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1913년 조각인 ‘공간 속에서의 연속적인 단일 형태들(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까지, 고대 신화와 미래의 사물 형태에서 이끌어낸 이번 2023 겨울 컬렉션에서는 마티유 블라지의 파운데이션 컬렉션에서 나타낸 ‘보치오니’의 실루엣의 컷에서 더욱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역동성은 의상에 생명력을 줬다. 사람들이 거리를 뒤덮을 때 도시는 생명력을 얻는다.
▲양말처럼 보이는 레더 스트립으로 뜬 부츠.
◇행진, 위계질서가 없는 축제
그의 의상은 ‘보이는 대로 믿지 말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착용자의 입장에서 그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경이가 다시 느껴진다. 부츠처럼 보이는 슈즈는 니트 양말 같은 형태였다. 하지만 이 조차도 레더 스트립으로 뜬 부츠. 인트레치아토 기법(꼬아서 만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보테가 베네타 하우스의 정신을 신발에도 구현한 것이다.
마티유 블라지가 구현해낸 캐릭터들의 대서사시는 계속되고 있지만, 그들은 이제 변형과 변주, 움직임을 통해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크함’의 의미와 그것이 시작되는 지점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81벌의 의상 ‘퍼레이드’에서 초기 실루엣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시작되며, 이후에는 고대 신화에서 영감 받은 요소들이 구체화되어 더욱 환상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아이디어에 대한 탐구가 담겨있다. 이번 패션쇼에서는 계급과 신분의 구분없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장소임과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옷을 착용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 감동적이고 사적인 즐거움을 주는 행위이자 옷을 통해 되고 싶은 그 누구든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수공 기법은 혁신을 거쳐 보테가 베네타의 시그니처 실루엣을 재해석하여 깊이 파이고, 뼈대를 갖추고, 슬릿 디테일을 더하여 재구성했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1482년작 ‘프리마베(Primavera)’ 속의 클로리스와 그녀가 변신한 플로라에 영감을 받은 섬세한 실크 자수는 여성의 변신을 표현했다.
“저는 ‘이탈리아의 퍼레이드’라는 아이디어가 정말 좋았습니다. 행진, 낯선 축제, 다양한 장소에서 모인 사람들은 어디서나 나타나지만, 그들은 같은 곳을 향합니다. 위계질서가 없는 곳, 모든 사람이 환영받는 곳에서는 무엇이 사람들을 이끌리게 하는 지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컬렉션과 쇼는 한 사람이 그림이나 문장의 일부를 만들면 그 다음 사람이 이어서 나머지를 완성하는 방식의 연상 기법 중 하나인 ‘우아한 시체(Exquisite corpse)’ 기법처럼 여러 가지를 새롭게 조합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낸다. 블라지는 직물에 대한 생각도 변형시켰다. 가벼우면서도 몸에 구속하지 않는 직물을 개발해 내려 애썼다. 가죽의 무게감을 줄이기 위해 얇게 더 얇게 조각해냈다. 컷과 수공 기법, 볼륨과 기법이란 코드의 연결, 길게 늘어트린 필 쿠페 자카드를 통해 새로운 창조물을 선보였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는 깃털과 물고기 비늘을 연상시키는 디테일을 이용한 룩과 하우스의 시그니처인 인트레치아토 위빙 기법으로 또 다른 룩과 레더 굿즈의 새로운 구성을 제시했다. 사르딘 핸드백 핸들에는 무라노 글라스의 터치로 반투명 핸들 디자인을 적용해 유연함을 더했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는 깃털과 물고기 비늘을 연상시키는 디테일을 이용한 룩.
▲하우스의 시그니처인 인트레치아토 위빙 기법으로 새로운 구성을 제시한 레더 굿즈. 사르딘 핸드백 핸들(맨 왼쪽)에는 무라노 글라스의 터치로 반투명 핸들 디자인을 적용해 유연함을 더했다.
◇처음과 끝의 연결…우리는 이제 서로 만나야 한다
그의 컬렉션 오프닝은 슬립 같은 느낌의 원피스와 양말 느낌을 가죽으로 만든 의상으로 시작한다. 거리의 퍼레이드인데 왜 잠옷 같은 의상일까. 원마일 웨어에 대한 오마주인가. 물론 ‘밤’을 위해 거의 입은 듯 안 입은 듯한 모습으로 섹시함을 극대화 시킬 수도 있겠다. 시스루 의상으로 유혹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일부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를 보면 아침 출근 시간이 너무 바빠 슬립에 코트만 걸치고 그럴싸한 핸드백을 매치해 마치 완벽하게 차려입은 듯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코로나로 거리가 한산해지고,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뜸해지고 홈웨어가 발달하는 동안 패션에 대한 관심은 뜸해졌다. 꾸밈은 때론 노동이 되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기 만족이자 투자이기도 하다. 마티유 블라지는 그를 비틀어 보여준 것은 아닐까.
어느새 마스크를 벗고 ‘언제 그랬었나’ 하며 따스한 햇살을 즐기기 위해 옷장을 뒤지는 동안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이런 생동감이 도시를 만든다. 그게 바로 블라지가 보치오니 청동상에서 바라본 역동성이다. 블라지 시즌1의 획기적인 가죽 탱크톱과 가죽 청바지가 쇼를 마감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서사의 마감이 있을까. 시즌 1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어쩌면 마지막에 등장한 그 의상에서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느낌이랄까. 이제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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