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태고지의 징후와 예감, 미래를 향한 깊고도 기묘한 사색
에르메스 아뜰리에 남화연 개인전 ‘가브리엘’
빛의 도시가 된 홀리데이 시즌,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의 육면체 건축은 그 자체가 도산공원을 밝히는 금빛 섬광이 된다. 2022년 끝과 2023년의 시작, 이곳을 반드시 방문해야 할 이유는 아름다운 메종 에르메스가 뿜어내는 금빛 향연을 감상하기 위해서도, 에르메스 ‘카페마당’ 에서의 근사한 브런치로 한해의 끝과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지하 1층에 자리한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남화연 개인전 ‘가브리엘(Gabriel, 2022)’을 감상하는 예술적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다.

통창 유리로 스며드는 ‘카페마당’의 햇빛을 등지고 ‘아뜰리에 에르메스’로 들어서면, 순간 멀티버스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듯 어둠 너머로 공기와 바람소리가 소용돌이친다. 전시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코다(Coda, 2022)와 메인 전시품인 ‘가브리엘’의 영상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사운드다. ‘코다’는 실내악에서 자주 연주되는 소나타의 종결부로, 주제 선율을 반복하고 변주하거나 확장함으로 곡을 마무리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 남화연은 공기가 주입된 관악기가 만들어내는 바람소리를 ‘코다’의 추상적인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확장된 변주의 코다처럼 길게 전시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황금빛 관악기의 선 배치는 전시의 주인공인 ‘가브리엘’ 영상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블랙 커튼 안으로 자연스럽게 관람객의 발길을 안내한다. 이 가늘고 긴 금속 파이프들과 해체된 관악기들과 만들어내는 대각선은 관람객들의 동선을 제안하는데, 리듬과 선율, 배치와 동선에서 독특한 시점을 보여주는 작가만의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이번 ‘가브리엘(2022)’ 전에서는 4점의 신작을 만나게 된다. ‘가브리엘’은 성모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내린 대천사의 이름이다. 신의 전령으로서 다가 올 일을 미리 전하는 그는 전쟁이나 탄생을 묵시하는 일을 담당한다. 그 중에서도 작가 남화연은 성모 마리아에게 내려진 수태고지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시간과 공간이 혼재된 상황을 보여준다. 약 20분 러닝 타임의 ‘가브리엘’은 수태고지를 둘러싼 신비로운 은유로 가득하다. 성모 마리아에게 수태고지 하는 광경을 담은 보티첼리, 로베르 캉팽,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르네상스 시대 명화는 화성 탐사 로버가 카메라에 담은 장면과 행성 내부의 지진파를 감지해 그려낸 스펙토그램으로 점프한다. 성모 마리아와 화성 탐사는 어떤 연결고리로 교차되는 걸까? 작가 남화연은 화성 탐사의 순간이 화성의 생명체들에게 고지를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해석했다. 현재는 모르지만 미래에서 이 화성 탐사의 순간을 본다면, 어떤 다른 생명체가 화성에 올 거라는 것을 알리는 고지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는 상상력이다. 또한 ‘가브리엘’의 전시 공간을 커튼으로 가린 방 형태로 꾸민 건, 팬더믹 기간 동안 심리적, 물리적으로 격리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상 ‘가브리엘’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는 ‘새로운 사원(A New Temple, 2022)’은 막 출토를 끝낸 고고학적 발굴 현장을 유토로 빚은 작은 조각군으로 재연해낸 것이다. 과테말라 밀림 속 마야의 도시를 자율 주행 차량에 이용하는 라이다(lidar)의 첨단 기술로 구현한 3차원 모델에서 영감 받아 만들어졌다. 밀림 위 헬리콥터에서 오래 전 과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라이다를 낯선 정령으로 본 것이다. 부식한 동판으로 작업된 ‘창문-꿈(Window-Dream)’은 닫힌 방에서도 화성 탐사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외계로 난 창을 의미한다. 두 시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작가 남화연의 주요 관심사였는데,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창문을 통해 당대 과학 기술의 발명품인 원근법을 실험했던 것이 현재 시대 컴퓨터의 창을 통해 화성과 우주의 메시지를 수신한다는 사실과 연결 지었다.

“이것은 모두 오래된 얘기다”. 언어와 서사 대신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가브리엘’의 시적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메시지다. 고지, 징후, 예감으로 표현되는 과거 속의 미래는, 그 미래가 된 현재의 시점에서는 오래된 얘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연대기적인 순차적 시간 질서를 벗어나, 미처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움 없이 응시하게 한다. 2022년을 끝자락에서 우린 2023년에 대한 여러 예감, 징후를 고지하고 또한 고지 받고 있다. 과연 2023년은 어떤 미래가 될까? ‘가브리엘’의 영상처럼 대혼돈의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 희망과 기대가 수없이 교차된다. 이러한 감정의 혼돈 속에서 작가 남화연은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던 성모 마리아처럼 그저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전시 ‘가브리엘’은 한 해의 끝과 시작에, 미래를 향한 깊고도 기묘한 사색을 선물한다.
▲주소: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45길 7 B1F 아뜰리에 에르메스
▲일시:11월 18일부터 2023년 1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