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은 잊어라 지금부터 “새로운 에트로”
입력 2022.10.14 10:15

에트로 Etro 파브리지오 카디날리 CEO 인터뷰

“에트로의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르코 드 빈센조의 비전도 굳게 믿었죠. ‘처음’은 단 한 번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백스테이지에선 공연 전후로 엄청난 에너지가 흘렀고, 쇼가 끝난 뒤 우리는 껴안았지요. 빈센조에게 ‘훌륭했다’(it went very well)고 이야기했습니다!”
지난해 9월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에트로의 신임 CEO로 부임한 파브리지오 카디날리./에트로 제공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에트로의 파브리지오 카디날리 CEO는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느낌이었다. 지난 9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3 봄여름 에트로 패션쇼’. 밀라노 도심에서 차로 한시간 정도 떨어진 외딴 공간에 패션계 종사자들이 잰걸음을 재촉했다. 1968년 창립돼, 50여년 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족 회사로 이름났던 에트로의 대표 구성원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 지난해 7월 세계 최대 명품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그룹(LVMH) 계열의 사모펀드 엘 캐퍼튼(L Catterton)사가 에트로의 지분 60%를 인수하면서 CEO와 디자이너 모두 바뀌었다.
지난해 9월 부임한 파브리지오 카디날리 CEO는 리치몬트 그룹(던힐, 란셀 등), 돌체&가바나 등 럭셔리 기업에서 25년 넘게 이력을 쌓은 패션계 전문가로, 동시에 투자자이기도 하다. 그는 엘 캐퍼튼과 함께 인수를 관리했고 브랜드의 잠재력을 깊이 연구했다. 카디날리 CEO는 쇼가 끝난 뒤 나눈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패션은 사회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제품 자체에서 벗어나, 그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중심축이 되고 있다”면서 “1968년부터 에트로는 포용력, 자기표현력, 사랑과 예술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라는 강하고 강력한 가치를 항상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가치로부터 미래를 내다볼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6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된 마르코 드 빈센조가 선보인 에트로는 에트로였지만 또 완전히 새로운 에트로이기도 했다. 에트로를 대표하는 페이즐리 문양과 페가수스 로고 등 과거 아카이브와 완전히 결별한 것도 아니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게 했다. 컬렉션을 준비할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브랜드의 유산(遺産)보다는 자신의 상상력에 더 의존했다는 빈센조는 보는 이의 상상력도 자극하게 했다. 과일과 꽃, 새 등 자연물이 마치 에트로의 역사 속 어느 한페이지에 숨어 있던 것을 뽑아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19세기 이탈리아 시칠리아 귀족들이 정원에 작은 길을 만들어 ‘미니 순례’를 하던 풍습에서 착안해, 옷을 통해 자신만의 정원을 걷는 듯한 명상에 스며들게 한 것이다.
마르코 드 빈센조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새롭게 합류하면서 선보인 2023 봄여름 에트로 컬렉션. 새틴, 자카드, 데님, 니트 등 다채로운 소재와 공들인 자수와 화려한 색채 등이 에트로의 미래를 더욱 기대하게 했다. 1978년생인 마르코 드 빈센조는 2008년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 기간에 자신의 브랜드를 처음 선보였으며, 2009년 7월에는 보그 이탈리아가 선정하는 신예 디자이너 콘테스트 ‘Who is on Next?’에서 우승하며 주목받았다./에트로 제공
마르코 드 빈센조는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블로 국내 패션 마니아에게 알려진 인물. 다양한 패턴과 신체를 왜곡하지 않는 간결한 재단과 각종 수공예 장식으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 펜디의 가죽 라인을 총괄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가능성을 높이 산 카디날리 CEO가 직접 채용했다. 카디날리 CEO는 “여러 디자이너를 인터뷰 했는데 그중 에트로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빈센조가 보여준 생각의 유동성과, 색을 섞는 그의 능력, 또 평온함에 반했다”면서 “궁극적으로 멋진 액세서리를 만드는 그의 훌륭한 능력이 계약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빈센조는 에트로가 갖고 있는 원단에 대한 다양한 장점을 최대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는 에트로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고 했다. 자신이 규정하는 에트로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소재의 다양성과 원단 질감의 차이, 그라데이션(농도의 변화) 기법을 통해 의상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연출하는 이에 따라 바지와 브라톱으로 연출됐지만, 바지 위에 셔츠를 입을 수도 있고, 속이 비치는 드레스를 덧입을 수도 있다. 새틴 드레스는 형광빛 모자와 어우러져 경쾌함을 더했고, 크리스털로 장식된 컬러블록 드레스는 빈센조가 선보였던 낭만적 감수성이 돋보였다. 가죽은 ‘잇백(it bag)’을 탄생시키는 빈센조의 장기 중 하나. 이번엔 페가수스 로고를 극대화해 선명한 E 로고와 사과 등을 담는 듯한 그물 형태의 작은 가방 등도 시선을 끌었다. 에트로의 ‘그 에트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자, 에트로의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는 표식이기도 했다.
두껍게 짠 비단(brocades)으로 장식된 데님과 이어진 부츠를 비롯해, 자카드와 비즈(beads) 등으로 구성된 경쾌한 브라탑과 자수가 수채화처럼 펼쳐진 카프탄(긴 기장과 헐렁한 소매를 가진 독특한 민족 의상) 스타일 원피스 등은 ‘메이드 인 이태리’ 특유의 장인정신을 엿보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에트로 제공
카디날리 CEO도 쇼의 문을 연 데님 섹션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부분을 꼽아달라는 이야기에 “쇼의 문을 연 데님 섹션이 너무 좋았다”면서 “브랜드와 매우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지만, 혁신적인 터치로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또 재고 직물(deadstock)과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업사이클링 가방 프로젝트인 ‘러브 트로터(LOVE TROTTER)’ 역시 손꼽았다. 그는 “패션 산업은 실수를 포함해 과거에 행했던 것을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모두 함께 변화에 참여해야 한다”면서 “마르코 드 빈센조가 지속 가능과 브랜드 유산에 대한 헌정 캡슐 컬렉션인 ‘러브 트로터’를 첫번째 프로젝트로 제시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에트로는 요즘의 ‘지속가능성’이 화제가 되기 한참 전인 지난 2001년부터 재활용 원단 등을 통해 탄소 중립 등을 선도한 바 있다. 이러한 에트로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인다는 계획이다. 러브 트로터는 글로벌 온라인 쇼핑 채널인 마이 테레사와 협력해 판매한다.
카디날리 CEO는 “마르코 드 빈센조가 도착하기 전 에트로는 페이즐리 프린트와 연결된 과감한 미학을 펼쳐낸 특별한 틈새 브랜드였고, 앞으로 더 탐색해 구현할 잠재력이 많다”면서 “유산과 공예는 우리가 시작하고자 하는 두 기둥이고, 앞으로 에트로를 미래 세대에게 중요한 가치를 물려줄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낙조 같기도 하면서도 일출 같기도 한 노랑과 주황이 곁들어진 패션쇼 무대는 에트로와 카디날리, 빈센조의 따뜻한 결함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듯한 바닥 문양은 에트로가 펼칠 에너지와 힘을 보여주는 듯 했다. 쇼가 끝난 뒤 열렬한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기립을 하는 이도 있었다. “에트로 같지만 전혀 다른 에트로”라는 찬사는 이탈리아 패션 르네상스의 또 다른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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