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00주년, 새로운 구찌 원년 선포…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는 글로벌 커뮤니티로서의 구찌를 키워나가겠다”
입력 2021.05.28 10:03

대를 이어오는 패션 명가(名家)의 이름은 알아도 그를 이끄는 수장(首將)을 기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인다. 시대를 읽어내며 트렌드를 앞장선 디자이너의 작품성으로 브랜드의 명운이 결정되는 듯한 패션계에서 경영자는 아무래도 디자이너 명성 뒤에 가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르다.
그의 이름은 패션사(史)에 ’21세기 패션 법칙을 뒤바꾼 기업가'로 굵직하게 기록되고도 남을 만하다. 그가 손대기만 하면 치솟는 매출에 ‘두 자리 수 사나이’로 불린다. 전통적인 패션 회사가 그의 등장으로 ‘혁신 기업’으로 탈바꿈한다. 그가 보여준 리더십과 업계에 미친 영향은 패션계를 넘어 경영사(史)에도 남을 만하다.
주인공은 마르코 비자리 구찌 회장.
1m90이 넘는 건장한 체격에, 언제나 열정 가득한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인 비자리 회장은 자신의 의상을 고르는 열의도 상당했다. 남들이 입는 보통의 슈트는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 고객 취향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해주는 구찌 슈트를 고르고 스스로 디테일을 택해 더한다고 했다. 구찌 스니커즈 마니아기도 그는 스니커즈 수집도 한다고 말했다. /구찌 제공
스텔라 매카트니, 보테가 베네타 등을 거치며 기업 체질을 바꿔놓는 데 성공한 그가
‘큰 형님’ 구찌를 맡은 이후 보여준 활약은 더욱 눈부시다.
2015년 부임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총괄 디자이너로 발탁해 세계 트렌드를 좌우하며 패션 질서를 새로이 정렬했다. 5년 만에 직원 수는 1만1000명에서 1만7000명으로 증가했고, 매출도 두 배 이상 성장했다. 기후 변화 대응에도 한발 앞장섰다.
2018년 이후 구찌는 자체 사업장과 공급망 전반에서 완전한 탄소 중립을 달성했다.
구찌가 가는 곳이 곧 길이었고, 업계는 뒤따라오는 형국이었다.
그런 그가 또다시 역사를 쓰고 있다.
올해 구찌 창립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구찌’로 거듭나는 ‘구찌 원년’을 선포한 것이다. 특히 한국에 관심 많은 그는 오는 29일 구찌의 국내 두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인 ‘구찌 가옥’을 서울 이태원에 선보인다. 지상 1층부터 4층까지 약 1015 ㎡(약 307평) 크기로 한국의 ‘집’이 주는 고유한 환대 문화를 담아, 방문객들이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표방한다.
그는 단독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동안 구찌와, 또 미켈레와 함께 한 시간을 ‘혁명’이자 ‘진화’라고 표현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는 글로벌 커뮤니티로서의 구찌를 키워나가겠다”고 말했다.
―구찌에 부임했을 때 100주년을 함께 할 것이라고 예상했는가?
“패션 전문가들은 약 5년을 주기로 패션 사이클이 돈다고들 한다. 나는 스텔라 매카트니에서 5년, 보테가 베네타에서 5년을 일했다. 구찌에서 5년이 지나고,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미켈레와 나는 이미 구찌와 깊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더 일 해보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100주년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지금이 구찌가 앞으로 100년을 위해 새롭게 길을 개척할 ‘신(新)세기’가 시작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구찌의 원년(YEAR ZERO)이라고 표현한다. 이 순간을 함께하는 게 정말 영광이며, 짜릿하다.”
―10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에 CEO를 맡는 기분은 어떠한가?
“나와 미켈레는 6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진화해온 길을 ‘혁명이자 동시에 진화(R-evolution)’라고 표현한다. 이 길은 아주 특별하면서도 섬세하다. 이 모든 것이 일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끊임없는 즐거움을 샘솟게 하는 원천이 된다. 그리고 즐거움(joy)은 나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의 핵심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옥’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익스클루시브 제품. 한국 전통의 ‘색동’ 문양에서 영감을 받은 바이아데라 GG 수프림 라지 리넨 토트 백. /구찌 제공
―오는 29일 ‘구찌 가옥’을 선보인다. 다른 곳이 메종, 하우스 등을 쓰는 데 반해 가옥이란 우리 말을 썼다. 국내 아티스트와의 협업 등 로컬과의 협업도 적극적이었다.
“구찌 가옥은 한국 전통 가옥의 독특한 터치와 미켈레 개인의 창의력이 어우러진 미켈레의 상상을 구현한 곳이다. 전통과 현대를 재해석한 공간이다. 나는 우리 팀원들에게 구찌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꿈을 꾸는 곳이라고 종종 강조하고는 한다. 모두가 구경하러 오게끔 환영하는 그런 곳 말이다. 특히 환경과 지역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이는 존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전 세계 사람들 모두를 하나로 묶는 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애임을 강조한다. 구찌는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는 글로벌 커뮤니티다.”
―국내 아티스트 카이를 글로벌 앰배서더로 발탁했다. 100주년을 맞아 카이 x 구찌 캡슐 컬렉션도 출시했다. 그에 대해 말해준다면.
“카이와의 관계는 특별하다. 구찌는 특별한 브랜드이고 카이는 아주 특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카이는 열성적으로 독서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정말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사람이다. 카이의 스타일은 무척이나 독특하고 아주 현대적이다. 음악과 춤에서 절대적인 자유가 느껴진다. 바로 구찌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하다.”
―5년 전 미켈레를 발탁했을 당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말이나 행동 같은 게 있었다면.
“처음에는 30분 정도 대화를 나눌 예정이었지만 결국 5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미켈레가 로마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문을 열어 주었을 때 우리의 첫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구찌 프린스타운 슬리퍼가 될 조각을 손에 든 채였다. 우리가 같은 파장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꿈을 공유했다. 우리는 마케팅 전략을 짜기보다 생각과 감정,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이미지의 종류를 설명하는 문서를 7~8페이지 정도 작성했다.”
―사업을 하면서 이것만은 꼭 지킨다는 점은.
“혁신은 일관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고, 혁신 없이는 정체만 있을 뿐이다. 비전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는 브랜드는 성공할 수 없다. 구찌가 구찌스러움을 지켜나가는 데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창의성과 신선함을, 그리고 혁신적인 바로 그 구찌에 대한 열망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미켈레는 바로 이런 부분을 구현해낸다.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직원 1만7000여명이 넘는 거대 기업이지만 스타트업만큼 의사 결정이 빠르다.
“내가 구찌에 오자마자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빠르게 생각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새로운 관중을 환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회사 사람들에게도 전하고자 했다. 낡은 업무 방식이 생명을 잃었고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과거의 패션은 어느 정도 무심함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가끔은 우월감을 전하려고 했으나, 나는 이런 점들이 언제나 끔찍했다. 그 시대는 이제 끝을 맞았다.”
―구찌는 유기농 재생섬유를 사용하는 재생라인, 업사이클인 ‘오프 더 그리드’, 중고업체 리얼리얼과의 협업 등 지속가능성 등 방면을 선도하고 있다.
“오늘날 패션 산업은 지구 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공급되는 물을 두 번째로 가장 많이 소비하는 업계이다. 기업으로서 구찌는 당장 행동을 취해야 할 의무가 있고, 부임 이후 빠르게 나서 2018년부터 완전한 탄소 중립을 계속해왔다. 개인적으로도 다른 CEO들에게 구찌와 함께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기후 위기에는 길을 개척하는 이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함께 행동해야 한다.”
―지금의 구찌 문화를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시한 건 무엇인가?
“구찌의 기업 문화는 공감, 포용성, 인간과 지구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직원들이 비정부단체(NGO)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체인지메이커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또 생물다양성 보호를 위해 지속가능성 프로그램에 투자하거나 디자인 펠로우십 프로그램 운영과 같이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려 한다. 현재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는 총 11명의 학생이 1년 동안 미켈레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선발은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졌고, 전 과정에서 구찌가 전반적인 재정 지원까지 하고 있다. 가치가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이 나의 좌우명이다. 경영 전문가 피터 드러커는 ‘전략은 조직 문화의 아침식사 거리 밖에 안된다(Culture eats strategies for breakfast)’라며 문화의 힘을 역설했다. 나는 이 말을 믿어왔으며, 이 덕에 구찌의 전략이 성공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구찌란 어떤 의미인가?
“미켈레가 브랜드의 공식을 재해석하고 패션 법칙(rule)을 효율적으로 개혁한 후, 나는 구찌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실하게 깨닫게 됐다. 우리가 독특하고 급진적이기까지 한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을 거라 100% 확신하게 되었다. 바로 럭셔리 산업이 장벽을 낮추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성별, 나이 사이에 벽도 두지 않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찌를 3단어로 표현한다면?
“아이 필 구찌(I FEEL GUCCI)”이다. 구찌 CEO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점 중 하나는 젊은 사람들이 기분이 좋다는 뜻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찌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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