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8’에서 무한대 기호 착안… 無와 무한대를 여행하는 시간의 깊이를 담았습니다”
입력 2021.04.09 10:13

로랑 도르데 CEO 인터뷰

에르메스 시계 CEO 로랑 도르데가 서울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에 있는 시계 진열장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에르메스 직원들은 가죽부터 향수, 가죽 태너리, 시계 등에 이르기까지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영감을 주며 품질과 창의성에서 공통의 철학을 공유하며 서로 토론한다”면서 “동시에 높은 성장도 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고 웃었다. /이태경 기자
역작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에르메스 시계가 선보인 새로운 남성 시계 ‘H08’이 직선과 곡선의 남다른 균형감으로 완벽한 맞춤 같은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걸린 시간도 3년 넘게 걸렸다. 여기에 신제품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것만도 꼬박 1년 넘게 걸렸다. 에르메스 시계부문 로랑 도르데 CEO는 시계 명가로 한발 더 도약하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지난해 초 한국을 찾았다. 코로나 광풍이 휘몰아치기 직전이었다. 매년 4월경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던 세계적인 고급시계 박람회 ‘워치스 앤 원더스(Watches and Wonders)’에 신제품을 화려하게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지난해 코로나 위기로 일정이 무산된 뒤 올해 디지털 플랫폼으로 재개된 박람회에 맞춰 신제품도 선보일 수 있게 됐다. ‘명품’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도르데 CEO는 “에르메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 하나가 진정성”이라면서 “우리가 무엇을 만드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드는지를 정확하게 저희 고객들과 공유하기 때문에 시계 역시 스위스 최고 기술을 활용해 ‘인하우스’(자체) 제작하며 기술적, 예술적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에르메스가 모든 시계 공정을 자체 기술 제작한 것은 10년 전부터. 인하우스 제조 체제를 마친 뒤 기술력과 예술성을 완비한 에르메스 시계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고 있다.
회계법인 아서앤더슨을 거쳐 1995년부터 에르메스에 몸담은 그는 2015년 시계부문 CEO에 올랐다. 에르메스는 시계 브랜드에선 드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두고 있는데, 2008년부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립 델로탈을 필두로 크리에이션 직원만 10명 정도다. 또 시계 장인 200여명을 포함해 스위스 3곳에 있는 시계 아틀리에에 총 300여명 정도가 일하고 있다.
디자인과 기술은 서로 상호협력하며 극복해 나간다. 해법을 찾아나가는 것 자체도 예술의 한 분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도르데 CEO는 “1978년 시계 부분을 론칭한 당시 장 루이 뒤마 회장님은 항상 ‘기존과 다른 디자인을 보여줘라. 기존 시계의 관념을 깨우치라’고 강조했다”면서 “상상의 진폭을 넓히는 것이 결국 기술의 진보도 이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계는 매우 작은 공간에 작은 모터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기술면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단지 시간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라 누구든 자신을 더욱 특별하게 보이게 만드는 예술품이기도 합니다.”
①에르메스 H08시계 블랙골드 마감. 가로 39 x 세로 39mm. 바디는 블랙 DLC 코팅 티타늄. ②블랙니켈 마감. 가로 39 x 세로 39mm. 전면 반사 방지 코팅 처리한 돔형의 사파이어 크리스탈이 있다.
창의성을 강조하는 건 에르메스 일원의 DNA처럼 새겨져 있는 일인듯싶었다. 도르데 CEO는 “에르메스는 헤리티지(Heritage)도 중요하지만 크리에이션(Creation) 메종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에르메스는 창의적인 장인)이며, 이는 에르메스 고유의 스타일, 판타지, 시(poem)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계 역시 최고 (시계) 브랜드보다 나은 수준에 있어야 하며, 점차 그렇게 인정받고 있지요. 특히 컴플리케이션(복잡) 시계분야 등에서 고유성, 창의성과 환상이 빛납니다. 프랑스의 창의성과 스위스의 노하우, 이것이 에르메스의 특성입니다.”
최고의 품질과 그에 못지않은 독창성. H08의 경우 형이상학 세계와 맞닿아있다. 특별한 인덱스가 눈에 띄는데, 이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에르메스만의 독창성. 에르메스만이 가질 수 있는 유산이기도 하다. 0은 무(無)를 상징하고, 8은 가로로 놨을 때 무한대를 뜻하는 기호가 된다. 무(無)와 무한을 오가는 시간의 신비와 깊이를 담고 있다. 물론 숫자 8은 에르메스의 액세서리 및 주얼리에서 볼 수 있는 샹 당크르(Chaîne D’Ancre·앵커 체인)에서 영감을 받은 듯도 보이지만, 시계 인덱스 하나로 시 한 편을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에르메스다. 패션과도 연결 고리를 만들며 완결성 있는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븐 스트랩 역시 H08을 위해 특별히 개발된 것으로 내구성과 착용감이 우수해 에르메스 남성복 라인의 스포티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도르데 CEO가 생각하는 시간이란 건 무얼까. 그는 먼저 에르메스 아쏘(Arceau) 시계 중 르 떵 서스팡뒤(le temps suspendu ·정지된 시간)’ 모델을 보여주며 말했다. “버튼을 누르면 현재 시각에 멈춰지고 다시 누르면 시간이 흐르게 할 수 있죠. 그만큼 현재를 충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이 시계는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올해의 베스트 남성 시계상’을 수상했다) 그 후에 나온 2017년도 컴플리케이션 모델인 ‘슬림 데르메스 레르 임파시엉트’(Slim d’Hermes L’heure impatiente·열망하는 시간)가 나왔죠. 일종의 기계식 모래시계죠. 약속된 시간 한 시간 전부터 레트로 그레이드 창 바늘이 움직여 ‘시간이 빨리 왔으면’하게 됩니다. ‘떵 서스팡뒤’에서 현재의 시간에 대해 얘기했다면 ‘레르 임파시엉트’에선 앞으로 다가올, 기다리는 동안의 즐거움, 행복함을 다뤘습니다. 시간은 마법입니다. 모두에게 행복할 순간이 오길!” 시계 하나로 시간을 대하는 자세와 위트까지 담고 있다. 이 얼마나 에르메스다운, 에르메스만의, 에르메스니까, 에르메스라서, 할 수 있는 발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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