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로 만든 새로운 트렌드, 친환경 럭셔리
입력 2021.04.09 09:48 | 수정 2021.04.23 10:32

초승달 디자인으로 유명한 마린 세르의 2021 가을 의상. 과거 원단 등을 조합해 멋스러운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들어냈다. 재고(deadstock)를 활용해 새로운 의상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최근 트렌드다. / 마린 세르 제공
‘쓰레기가 돈이다.’ ‘버린 옷도 다시보자.’ 당신의 옷장 속에서 잠자고 있는 옷들이 당신에게 부(富)를 가져다줄 지도 모르겠다. 쓰레기통에서 꽃이 핀다하지 않았던가. 그냥 쌓아뒀던 물건들이, ‘기부해도 안 받는다’고 외면받던 물건들이 이제 한 몸값 할 것 같다. 요즘 최고의 패셔니스타가 되려면 ‘거지왕 김춘삼’은 ‘형님’하고 무릎 꿇어야 할 정도가 돼야 하려나 보다. 버릴 옷을 서로 자르고 붙여 기워입고 고쳐 입는 게 ‘멋쟁이 중의 멋쟁이’이기 때문이다.
미국 중고거래 플랫폼인 더리얼리얼에서 선보인 ‘리컬렉션’ 발렌시아가 티셔츠. / 더리얼리얼 제공
◇재고(deadstock) 원단이 런웨이로
최근 명품 업계는 이전 같으면 태워버렸을 사장(死藏) 재고(deadstock)를 이용해 제품을 만드는 것이 트렌드다. 팔리지 않는 상품을 과감하게 태워 ‘희소성’과 ‘품격’을 추구했던 그들이지만, 지속가능성이 중요해지면서 재고품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프랑스에선 사용 가능한 제품을 파괴하는 걸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유럽 연합 역시 유사한 금지 법안을 제안했다. 실제 땅과 바다에 버려지거나 소각되는 폐의류로 인한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은 연간 120억톤으로, 이는 전 세계 온실 가스 배출량의 10%에 달한다.
영국 여왕 디자이너 상을 받은 프리야 알루왈리야가 이끄는 알루왈리야 스튜디오 20 가을. 재생 면과 빈티지 원단 등을 이용하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 알루왈리야 스튜디오 제공
재고 원단 활용으로 이름난 가브리엘라 허스트 2021 가을 패션쇼. / 가브리엘라 허스트 제공
재고 원단 활용한 알렉산더 맥퀸 2021 봄여름 의상. / 알렉산더 맥퀸 제공
영국 새빌로 슈트 디자이너 패트릭 그랜트가 이끄는 이타우츠(E Tautz) 20 가을겨울. 왕실의상을 담당했던 에드워드 타우츠가 1867년 설립한 브랜드로 현재는 좀더 캐주얼한 남성상을 그리고 있다. / 이타우츠 제공
영국의 뜨는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래번의 20가을겨울 작품. 재활용원단을 이용하는 그는 군용 낙하산 등을 이용했다. / 크리스토퍼 래번 제공
더리얼리얼의 ‘리컬렉션’ 라벨. 발렌시아가 제품 라벨과 함께 달려있다. / 더리얼리얼 제공
법안까지 마련되긴 했지만 친환경·지속가능성을 실천해왔던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이미 유행 아닌 유행이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 마린 세르는 2020 봄여름 컬렉션에 재고를 사용해 환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재고 원단인 것을 디자이너가 직접 말하기 전에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었다. 루이비통 남성 디자이너인 버질 아블로도 2021 봄여름 쇼에서 재고를 이용한 의상으로 눈길을 끌었다. 전 시즌에 사용됐던 의류와 재고 섬유를 이용했다. 프라발 구룽, 타냐 테일러, 조나단 코헨 등 젊은 디자이너 역시 지난 시즌 원단을 사용해 새로운 의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한마디로 ‘업사이클링’이다.
업사이클링은 친환경을 표방하는 일부 브랜드에서 시행되긴 했지만 최근 들어선 이 대열에 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명품 업계들이 먼저 나서서 업사이클을 시도하고 있다. 탄소 제로 등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각종 오염물과 폐기물 방출 등을 줄이는 것이다. 단지 ‘명품’이라고 구매하는 게 아니라, 브랜드의 의미를 찾아 구매하는 MZ세대를 겨냥한 움직임도 있지만, 전 지구적인 위기에 뜻을 함께하며 트렌드를 주도하겠다는 약속이다. 모피 반대 운동과 각종 친환경 소재 이용으로 이름난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는 이미 이러한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LVMH 그룹에 속한 브랜드 일원으로 그룹 내 친환경과 지속가능을 주도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스텔라 매카트니는 해외 매체를 통해 “그동안 가진 유기농 데님 등 제로 웨이스트 소재를 거의 다 업사이클링 해서 재료가 바닥날 정도가 됐다”면서 “새로운 컬렉션을 위해 재료를 추가로 사지 않게 되는 것을 엄청난 성취라고 생각하고 이젠 또 다른 폐기물을 찾아 재활용할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며 설레 했다. 아방가르드 디자인의 혁신가인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 역시 농구네트를 드레스로 변모시키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미우미우는 ‘지속가능한 환경친화적 패션 산업’을 위한 밀라노 ‘그린카펫패션어워드’에 맞는 ‘업사이클드 바이 미우미우’ 캡슐 컬렉션을 선보였다. 빈티지 드레스를 다시 고쳐 아름다운 작품으로 선보인다. 뉴욕 브랜드들 역시 이 대열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코치가 다양한 빈티지 컬렉션을 선보인데 이어 뉴욕서 인기있는 신진 디자이너 콜리나 스트라다는 중고 티셔츠를 이용해 멋진 드레스를 만들었다. 뉴욕에서 ‘핫’한 브랜드인 가브리엘라 허스트도 버려진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고 재고 원단을 이용한 의상들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중고거래 ‘더리얼리얼’의 재고의류 실험
H&M이 영국 신발 브랜드 굿 뉴스(Good News)와 협업한 스니커즈 컬렉션을 선보인다. 바나나 나무로 만든 섬유인 바나나텍스와 비건 포도 레더인 베지아 같은 소재를 사용했다. / H&M 제공
뉴욕 패션계의 미래라고 불리는 에밀리 애덤스 보디가 선보인 남성복 브랜드 보디(bode). 빈티지 원단만을 이용해 디자인하는 게 브랜드 특성이다. / 보디 제공
루이비통 남성 2021 봄여름. 다양한 재고 원단을 이용해 패션계 화제를 일으켰다. / 루이비통 제공
네덜란드 출신 세계적 디자이너 빅터앤롤프가 선보인 21 오트쿠튀르 패션쇼. 쿠튀르에도 재고 원단을 이용한 드레스를 선보이는 시대가 됐다. / 빅터앤롤프 제공
영국 대학에 원단을 제공하고 있는 알렉산더 맥퀸. /알렉산더 맥퀸 제공
최근 들어선 글로벌 온라인 중고거래 마켓플레이스인 ‘더 리얼리얼’이 선보인 ‘리컬렉션’도 화제다. 발렌시아가, 드리스 반 노튼, 스텔라 매카트니 등 유명 브랜드로부터 기증받은 50점의 작품들과 함께 첫 선을 보였다. 회원 2100만명을 보유한 더 리얼리얼은 ‘순환 경제’를 표방해왔다. 럭셔리 제품을 수리하는 등의 서비스를 통해 ‘수명 연장’을 꾀했다면 이젠 업사이클을 통해 새로운 작품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러한 리컬렉션(recollection)이 발표되자마자 일부 제품은 바로 품절되는 등 높은 인기를 누렸다.
재고 원단은 미래 세대를 위한 창의력 투자가 되기도 한다. 영국 럭셔리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은 영국 전역의 대학교, 전문 대학교, 지역 교육기관에서 패션과 섬유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맥퀸의 원단을 제공하기로 발표한 것이 그것이다. 2019년 맥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라 버튼은 컬렉션 제작이 끝나고 남아서 보관 중인 여성복 태피터와 남성복 테일러링 옷감 등의 잔여 소재를 재분배함으로써 창작 교육을 지원한다는 알렉산더 맥퀸의 새로운 계획을 소개한 바 있다. 사라 버튼은 “원단 기부는 알렉산더 맥퀸이 영국 전역에서 정규 및 고등 교육 과정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들과 맺어온 두터운 관계를 바탕으로 시작됐다”면서 “젊은 창작자들이 크나큰 어려움을 겪는 이 시기에, 우리의 자원을 나누고 새로운 기회에 눈을 뜨게 해주는 활동에 최선을 다하며 그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졸업 작품, 장단기 교육 과정, 워크숍에 맥퀸의 원단이 사용됐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가속화되고 있다. 코오롱FnC부문에서 전개하는 업사이클링 패션 브랜드 ‘래코드’가 젊은 층에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어 현대백화점기업의 패션전문기업 한섬은 국내 패션업계 최초로 재고 의류 폐기를 친환경 방식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불태워 폐기하던 기존 처리 방식이 환경보호에 역행한다는 우려가 커지자, 재고 의류를 ‘업사이클링(Up-cycling)’해 친환경 마감재로 다시 선보이기로 한 것이다. ‘탄소 제로(0) 프로젝트’는 폐기될 재고 의류를 폐의류 재활용업체(㈜세진플러스)가 고온과 고압으로 성형해 친환경 인테리어 마감재(섬유 패널)로 만드는 게 특징이다. 한섬은 그동안 브랜드 관리 차원에서 매년 신제품 출시 후 3년이 지난 재고 의류 8만여 벌(약 60톤)을 소각해 폐기해 왔다. 회사 관계자는 “‘탄소 제로(0) 프로젝트' 운영으로 재고 의류를 소각하지 않아, 매년 약 144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감소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는 30년산 소나무 2만여 그루를 심는 것과 맞먹는 수준이다. 회사 관계자는 “재고 의류를 소각하지 않고 친환경 방식으로 처리하면 비용이 기존보다 6배가 더 들고, 처리 기간도 1~2주 이상 더 걸린다”며 “국내 패션업계를 선도하는 대표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친환경 재고 의류 처리방식을 앞장서 도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해외 전문가들은 “업사이클링에도 뉴노멀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미 너무 많은 의류가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 이상의 의류가 생산되기 때문에 재고가 남는 것이고 결국 환경에 위협을 가하는 악순환이 되고 있다는 것. 어떻게 하면캠페인 그룹 패션 액트 나우의 공동 창립자인 사라 아놀드는 미국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자원 순환 시대에 초동 의류가 너무 많이 생산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제라도 업사이클에 많은 브랜드가 동참하는 것이 패션계 ‘제3의 물결’이 돼야 할 시점이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