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 속 수묵화
입력 2021.03.26 09:52

[THE BOUTIQUE 편집장 레터]

예술가의 혼(魂)이란 걸 귀에 박히게 들어도 저절로 숙연해지는 경험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일 수도 있고, 인생 경험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아마도 가슴보다 머리로 받아들이려 해서였을 것이다. 해외에 갈 때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을 때마다 다른 건 못해도 미술관부터 찾았었지만, 향유에 앞선 의무감이 강했었나 보다. 그 앞에서 자신을 턱 놓아두고, 작품 속으로 빠져들어 가기 보다는 붓 터치 하나, 드로잉 방식 하나 모두 따져보는 것이 먼저였던 것도 같다. 작품 탄생 배경은 무엇인지, 뭐라고 해석해야 하는지, 계속 만들어진 ‘정답’을 향한 강박 속에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메종 바카라 서울 1층에 방의걸 화백의 ‘여름날에’. 작가의 구상작품 중 대표적인 대작으로 수많은 붓질이 돋보인다. 2층에도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 메종 바카라 서울 제공
메종 바카라 1층에 전시돼 있는 방의걸 화백의 작품 ‘공 II’. / 방의걸문화예술연구소 제공
예술(art)은 기술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만이 터득해낸 기술이 쌓이고 실험과 도전을 거듭하며 세월을 입을 때 예술은 생명력을 얻는다. 예술이 말을 거는 순간, 그저, 즐기면 된다는 것을 왜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 노래를 들으면서, 어느덧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걸 나도 모르게 닦고 있을 때, 그때서야 알았다. 마음은 음속보다 더 빨리 움직인다는 것을. 온갖 기교로 꾸며놓는다 해도, 가슴으로 부르지 못하면 그저 잘 닦아놓은 장식품 같다. 기술력에 감탄은 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 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 같은 경험을 하긴 어려울 것이다.
문득 마주한 작품에서 예상치도 못한 감정을 느끼게 됐다면, 그건 내가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인 것일까. 아니, 그건 아직 멀었을 듯싶다. 아마 그 사람의 혼이 작품을 뚫고 나올만한 기운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를 배경으로 먹빛을 발산하는 현대 한국화의 대가인 목정 방의걸(木丁 方義傑) 화백의 작품이 그랬다.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청담동 메종 바카라서울에서 열리는 ‘Blank 展; 목정 방의걸 특별전’이다. 1764년 세워진 프랑스 최고급 크리스탈 회사인 바카라의 찬란한 컬러감과 대조를 이루는 방의걸 화백의 묵직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는 여느 화이트 큐브 갤러리가 아니어서 더욱 살아있는 듯 하다. 연극적인 ‘낯설게 하기’가 마치 이 공간에서 한 폭의 이야기처럼 펼쳐진다.
그의 작품은 멈추었으나 멈춰 있지 않고, 틀 안에 있으나 틀을 벗어나 있었다. 고요한 듯 춤추고, 육중하면서도 날렵하다. 한없이 한가했다가도 날 선 듯 격렬해진다. 공(空)’, ‘해맞이’, ‘산’ 등 작가의 핵심 연작은 햇살을 잔뜩 머금고 영원불멸의 빛을 뿜어내는 바카라 크리스탈 제품과 시공간을 뛰어넘는 대화를 한다. 60년 넘는 세월동안 타협 없이 자신만의 깊이감을 찾아냈던 방 화백 작품은 250년 동안 어떤 타협도 없이 고집스럽게 기술을 연마했던 바카라의 정신과도 겹쳐 보인다. 마음속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고, 반복적인 과정에서 예술적 심연이 깊어지는 과정 속에 그 사람이 되살아난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한 때의 유행으로 치부되고, 누군가는 고전으로 추앙받는 그 공간 사이에 장인 정신과 예술혼이 교차할 것이다. 장인들의 손길이 담긴 작품이라도 옷장 속의 패션이 되느냐, 세계적인 태피스트리로 박물관에 전시되느냐의 경계선 역시 비슷할 것이다.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유혹에 잠시 눈감는 사이 예술가도 역사적인 브랜드도 존재를 잃을 것이다. 식물 추출성분을 이용하는 피토 피토테라피(phytotherapy·약용식물요법)의 세계를 구축하며 타협하지 않고 품질에 모든 것을 쏟는 시슬리의 기업 정신 역시 여러 면에서 궤를 같이하는 듯 보였다. 잠시 잠깐의 화려함에 흔들리는 건 한순간이다. 예술이든, 제품이든 무엇이 됐든,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 유행에서 고전으로 나아갈 경계선이 그때서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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