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가을·겨울 남성 패션쇼를 마주하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면, 멈춘만큼 뒤처졌다는 것이다. 적어도 패션계에선 그렇다. 멈추는 순간 도태된다.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가 다시 한 번 진심 어린 박수를 받아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시야를 확장해 자신의 틀을 항상 깨려고 했던 프라다는 지난해 라프 시몬스라는 걸출한 디자이너와 손잡으며 또 한 번 패션사를 다시 썼다. 벨기에 출신 라프 시몬스는 가구 디자이너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된 인물. 질 샌더, 크리스챤 디올 등을 성공시키며 간결하면서도 컬러풀한 색상 조합으로 팬을 몰고 다녔다. 최근 둘이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함께한 프라다의 2021 FW 남성 패션쇼는 기대 이상이었다. 지난 여성쇼 역시 성공적이라는 평가였지만 이번에 처음 선보인 남성쇼는 그를 뛰어넘었다. 다채로운 색상과 유연하면서도 빈틈없는 디자인의 조화는 보는 이를 그 자리에서 매혹시켰다. ‘Possible Feelings’이란 주제로, 인류 개개인의 몸과 자유로운 마음을 추구했다.

이번 쇼는 여러 가지로 ‘프라다’의 제2전성기를 알리는 귀환이기도 했다. 여성 운동에 목소리를 높이던 정치학도에서 가업을 위해 패션디자이너로 변신한 프라다는 2000년대 초반 건축가 렘 콜하스와의 협업으로 뉴욕 플래그십을 열며 공간 혁신 개념을 확장했다. 이번 런웨이 공간은 렘 콜하스가 이끄는 건축가 싱크탱크 연구소 AMO(Architecture for Metropolitan Office)와 협업해 대리석, 레진, 플라스터(회반죽)와 인조 퍼를 조합한 ‘non-spaces’가 배경이 됐다. 모델들은 리나일론, 부클레 트위드, 핀 스트라이프 울 수트와 기하학적 패턴의 자카드 니트와 레더를 조합한 의상을 선보였다. 오버사이즈 코트와 니트 스키니 등 구조적인 레이어링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전 세계 핵심 시장 6개 지역에서 선발된 학생과의 담화. 건축·패션 디자인 학도들이 미우치아, 라프 시몬스와 온라인으로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이다. 한국도 주요 국가 중 하나로 꼽혀 두 명의 학생이 두 디자이너의 철학과 교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프라다의 개방성이 돋보였다.

이번 2021 FW 남성 패션쇼는 자연을 동경하는 우리의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코로나로 인해 실내에 유폐된 것과 마찬가지였던 지난 1년. ESCAPES(이스케이프·탈출)이란 주제로, 버버리는 도시를 벗어난 삶을 꿈꾸는 인류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경의로 쇼를 완성했다. 야생 동물에서 영감 받은 애니멀 킹덤 프린트는 다시 화제. 니트 비니, 말발굽 모양의 스니커즈 등이 눈에 띄었다. 버버리 전통성을 잇는 베이지, 다크 브라운 등과 장식 디테일로 공동체를 표했다. 토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발테르 키아포니는 #sevenT라는 표제어를 제시했다. 7은 일주일, T는 토즈 혹은 시간을 뜻한다. 토즈를 통한 삶과 스타일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다. 트위드, 울, 견고한 코튼에 쓰인 따뜻한 어시(earth) 색감은 자연을 대표한다. 에르메스는 트레이닝복에서 보던 끈 달린 바지로도 우아하게 연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편한 아름다움’ 같이 어색하게만 들리는 단어가 에르메스를 통해 실체화됐다. 제냐의 알레산드로 사르토리는 ‘리셋〈THE (RE)SET〉’을 내세워 대중과 개인, 사적인 공간과 공공의 공간을 아우르는 유동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며 실내외에서 한가로이 거닐거나 생활하고, 일하고, 때론 충돌이 일어나는 장면들 가운데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준다. 유동적이고 편안한 디자인의 새롭게 변형된 저지 원단의 옷을 주력으로 내세웠다.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은 독특한 니트와 가죽 바지로 해체적이면서도 덧이어붙인 듯한 구조성을 구현해냈다. 돌체앤가바나는 젊은 세대와의 지속적인 대화인 ‘DG TOGETHER’를 내세워 현재성을 확보했다. 편안하면서도 다양한 실루엣의 변화로 세련됨을 더했다. 새로운 세대가 자신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하는 수단인 메이크업, 네일아트 그리고 레디-투-웨어 등을 조합했다. 루이비통의 버질 아블로는 인종과 성별에 갇혀 있는 편견을 탈피하자는 의도를 선보였다. 공항 라운지를 연상시키는 공간에서 비행기 모양을 한 가방과 의상 버튼은 그만의 유머와 재치가 엿보인다. 가나 출신인 그는 전통의상을 현대적으로 결합해 자신의 뿌리를 파고들기도 한다. 의상으로 직업을 규정짓는 태도에서 벗어나자고 외친다. 끌리는 길이감의 롱코트, 대리석을 닮은 정장 등도 형태를 재해석하는 새로운 접근. 루이비통 커피 컵, 비행기 모양 가방 등 액세서리에는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