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선으로… 재창조된 우아함
[THE BOUTIQUE 편집장 레터]
명품 브랜드가 주목하는 K팝 아티스트 ‘에스파’

역사를 지닌 패션하우스 명맥은 어떤 디자이너를 새롭게 영입하느냐로 시작한다. 브랜드의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와 호흡하는 최적의 인물을 찾는 건 그만큼 더 어렵다.
하우스 DNA를 담은 고집스런 장인정신과 융화되면서 디자이너 고유의 개성을 드러내는 혁신은 때론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길을 걷기도 한다. 충성스런 기존 고객을 얼마나 설득하느냐도 관건이다.
지난해 프랑스 패션브랜드 지방시(Givenchy)가 새로운 디자이너로 이 남자의 이름을 발표했을 때, 지난 2018년 세상을 뜬 디자이너 위베르 지방시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
미국 출신 패션 디자이너 매튜 M. 윌리엄스(36).
둘이 닮아서가 아니다.
외모부터 디자인 스타일까지 어느 하나 비슷한 게 없어 보이지만, 위베르 지방시가 보여줬던 시대적 비전이 이 남자를 통해 재현될 듯한 기대감 때문이다.
하위문화를 하이 패션으로 탈바꿈시키는 건 ‘요즘’ 디자이너들의 트렌드. 매튜 윌리엄스 역시 그의 선봉이었다. 패션을 독학한 그는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눈을 지녔다. 놀이공원 안전벨트를 패션 아이템으로 재해석한 ‘롤러코스터 버클’은 그의 시그니처가 됐다. 전형성에 대한 반기는 1020세대를 열광케 했다. 스포츠 느낌이 강한 매튜 윌리엄스의 스타일은 그 이름 자체로 MZ 세대에겐 ‘믿고 사는’ 역할을 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우아함의 극치인 지방시와는 이미지상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지방시는 오드리 헵번의 리틀 블랙드레스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튜 윌리엄스는 단지 옷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로고를 이용한 액세서리나 이를 또 의상에 접목해 경박하지 않은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여기서 ‘롤러코스터 버클’처럼 생각을 뒤집는다. 지난해 말 데뷔 컬렉션이 그 시험대였다. 보통의 런웨이 대신 유명 모델·인플루언서 등에게 스스로 스타일링한 사진을 개인 소셜 미디어에 올리게 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대면 패션쇼가 어려워진 것도 있지만, 영상 등으로 대체하는 일반적인 비대면 쇼의 방식을 다시 한번 비틀었다. 옷은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결국 입는 사람의 개성으로 재창조된다는 그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이 대목은 위베르 지방시를 불러일으킨다. 마네킹에 진열되는 장식품으로서의 옷이 아니라, 입는 이의 체온으로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는 유기체라는 관점을 설파했던 것이 위베르 지방시였다. 풍성한 베이비돌 드레스로 갇혀 있던 허리선을 해방시켰다. 흑인 모델 등 다양한 국적의 모델을 기용한 첫 번째 디자이너이자 오늘날 필수가 된 ‘다양성(diversity)’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랬던 매튜 윌리엄스가 얼마 전 또다시 세계를 놀래켰다. 브랜드를 맡은 뒤 처음으로 ‘앰배서더’를 임명하면서 K팝 신예 걸그룹 ‘에스파’(aespa·sm엔터테인먼트)를 낙점한 것이다. 지방시 역사상으로도 K팝 아티스트가 브랜드 앰배서더가 된 것은 에스파가 최초다. 카리나(21·한국) 지젤(21·일본) 윈터(20·한국) 닝닝(19·중국) 등 4인조 걸그룹. 엑소 카이(구찌), 현빈(오메가), 송혜교(펜디) 등 이미 많은 다른 럭셔리 브랜드가 한국 스타를 브랜드 앰배서더로 임명했지만, 글로벌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K팝 루키에 대한 영향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멤버 각각이 뿜어내는 에너지 역시 매튜 윌리엄스를 사로잡은 부분. 하지만 그의 시선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AI를 접목해 탄생한 에스파의 세계관을 주목했다. 현실 세계 멤버와 가상 세계 아바타 멤버가 서로 소통하며 성장해 가는 구조다. 에스파라는 이름이 아바타(Avatar)와 익스피리언스(Experience)의 앞글자를 딴 ‘ae’와 양면이라는 뜻의 ‘aspect’를 결합해 탄생했다. 아바타와 현실 멤버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조언도 해 준다. 4명이지만 아바타와 함께인 8명으로 공연할 수도 있다는 얘기. 컬처 테크 트렌드를 주도하는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가공·추상'을 의미하는 ‘메타’와 ‘유니버스’(세계관)의 합성어) 시대의 패권 경쟁을 매튜 윌리엄스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미래형 문화 산업의 비전을 에스파를 통해 읽어낸 것이다. 시대적 선지자(visionnaire)였던 위베르 지방시의 DNA를 매튜 윌리엄스는 의상, 음악, AI 등까지 다양하게 접목해내려는 듯 보인다. 우아함이란 결국 태도에서 나온다. 매튜 윌리엄스의 지방시가 보여주는 미래적 비전이 22세기형 우아함으로 재창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