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트 입은 캐주얼, 다시 날아오르는 희망을 그리다
입력 2021.01.15 10:02

지난 2017년 10월 26일 패션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가 미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초청 강연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미 위스콘신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 공대 건축학 석사출신으로 패션계 드문 ‘비패션 전공자’였다. 파이렉스 비전(2012)·오프 화이트(2013) 등 자신의 브랜드로 하이엔드 스트리트 패션 장르를 개척했다. 클럽 DJ로 전 세계를 누비고, 소셜 미디어로 대중과 대화했다. 브랜드를 넘어 버질 자체를 추종하는 ‘팬덤’에 ‘아블로 현상’ ‘아블로이즘(아블로주의)’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하버드대 강의실 밖으론 그에게 사인받으려는 학생이 줄을 이었다. 미어터질 정도로 학생들의 빽빽한 열기 속에 그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소식. 프랑스 명품 루이비통 측이었다. ‘당신을 남성복 총괄 디자이너로 영입하고 싶다.’
이듬해 3월 그는 루이비통 164년 역사상 첫 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다. 뉴욕타임스 등 해외 매체들은 ‘역사적 사건’이라며 빠르게 타전했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 이민자의 아들이 일궈낸 ‘혁명’이었다.
‘밀레니얼 세대의 칼 라거펠트’(뉴욕타임스) ‘우리 시대의 앤디 워홀’(영국 일간 가디언)…. 존재가 문화 현상인 버질 아블로가 루이비통 남성복 총괄 디자이너 임명 이후 처음으로 국내 언론에 나섰다. ’2021 프리폴 컬렉션'을 단독 공개한 그는 온라인 인터뷰에서 ‘순응’(conformity)이란 단어를 꺼내들었다. “뉴노멀 시대엔 이전의 문제점을 답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시류에 자신을 맞추는(conforming) 것이 아닌, 집단이나 사회 문화에 포용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의미로서의 순응이 새로운 가치로 떠오를 것이다.” 동조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는 활주로를 배경으로 한 이번 컬렉션에서 “다시 날아오르는 희망”을 그리는 한편, “출신이나 외모로 한계를 두는 구시대적 관습과 편견에서 탈출하자”는 뜻을 내포했다.
그는 컬렉션 노트를 통해 ‘진화해온 기득권층의 따분한 드레스 코드를 탐구한다’고 했다. 지극히 평범해서 어떤 이들에게는 상속된 전통적 의복이기도, 또 어떤 이들에게는 열망의 의복이기도 한 남성복의 전형성에 대해 버질 아블로 특유의 재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루이비통 합류 이후 포용성과 다양성, 유대감이라는 철학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설파한 버질 아블로는 기존의 엘리트주의에 자신만의 가치를 더해, 좀 더 편안하면서도 재기넘치는 디테일로 럭셔리 슈트의 공식을 새롭게 썼다.
2021 가을 프리컬렉션 작품에서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백-투-워크 테일러링(Back-to-work tailoring)’ 표현 기법. ‘코로나 재택’ 이후 출퇴근 복 의미가 희미해진 요즘 아블로는 옷장 속에 겨우 숨쉬고 있던 정장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 한층 여유로워진 실루엣, 타이다이 갤럭시 모노그램 프린트를 거침없이 표현한 수트, 비대칭의 모노그램 가죽 패널로 재구성한 가방, 슬리브를 따라 루이 비통 로고를 첨단 기술로 양각 처리한 피코트로 이어진다. 수트는 후드나 집업 재킷 또는 올-데님(all-denim)으로 접목해 재해석한다. 버질 아블로니까 해낼 수 있는 시도다. 또 캐주얼의 대명사인 블루종, 카디건, 셔츠가 다미에 솔트 프린트(Damier salt print)를 만나면서 기존의 전형적인 클래식 느낌은 흐릿해진다. 가장 단순할 수 있는 의상이 고급스러운 새 새생명을 입는 것. 캐주얼이 프린트를 입어 구시대적인 감각은 사라지고 또 다른 시너지가 일어난다.
“패션을 픽션과 구분하라”, 그리고 “당신의 직업이 당신을 규정짓게 하지 말라” 버질 아블로가 루이 비통에서 매시즌 소개하는 ‘버질 아블로 단어집’에서의 인용 문구들이 컬렉션 전반을 장식한다. 이 인용구들은 인타시어(intarsia· 바탕색으로 짠 편직물의 속에 다른 색으로 짠무늬를 끼워 넣은 것처럼 짜맞추는 방식) 스웨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죽 블루종(점퍼)에는 음각 처리, 외투의 독특한 원단에 새겨져 옷감이 비를 맞으면 문장이 드러나기도 한다. 스케이터 모자는 가죽, 파이톤, 혹은 데님 소재로, 스카프는 갤럭시와 다미에 솔트 프린트로 해석됐다. 메탈 체인 주얼리도 확대됐고, 특히 지구와 트렁크 펜던트가 달린 어라운드 더 월드(Around the World) 목걸이와 팔찌가 ‘포인트’다.
슈즈는 기존의 친근함을 비틀어 클로그 더비(clog derby)를 블랙 가죽으로, 그리고 버클드 뮬(buckled mules)을 블랙 혹은 모노그램 가죽으로 선보인다. 시그니처 루이 비통 스니커즈는 옐로우와 그린 컬러로, 가방은 검은 가죽 트리밍이 된 남색(indigo) 클래식 캔버스 소재에 다미에 솔트 프린트를 더해 재해석 됐다. 또 다양한 색조로 트리밍된 스톤 컬러로도 선보인다. 컬렉션은 시그니처 메탈 리벳(metal rivets·금속 고정)과 가죽 모서리 디자인이 추가된 새로운 슬링백(어깨끈이 달린 가방)을 소개하는 반면, 새로운 메신저 백은 모노그램과 팝 컬러의 LV 글자가 들어간 실용적인 고무 베이스로 만들어진 모습으로 소개된다. 마지막으로, 토널 블랙(tonal black·검은색조)과 더스키 그린(dusky green·어스름한 녹색)의 가죽 가방 시리즈에는 그래픽 3D 모노그램이 음각됐다. 하우스의 가장 클래식한 형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루이비통 제공
―코로나로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잃었다. 당신에게 끼친 영향은. 컬렉션에 어떻게 투영됐는가
“코로나 동안에 발생했던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에서 알 수 있듯, 팬데믹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시작과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 시위가 일어났을 무렵 나는 이미 내 자신의 문화적 유산로부터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작업하고 있었다. 당시 사건은 루이 비통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들인 포용성(inclusivity)과 다양성, 그리고 정체성의 자유를 향한 믿음을 더욱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자극이 되었다.”
―LV 로고와 모노그램, 다미에 등 LV를 상징하는 로고와 패턴들이 다양하게 접목됐다.
“로고는 루이 비통의 문화 유산을 표현하는 가장 즉각적이면서도 강렬한 방법이다. 다양한 크리에이티브의 일환으로 로고를 적용하면서, 로고의 가치는 더욱 진보하고 발전한다. 즉, 어떤 면에서 로고는 포용력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한다.”
―이번엔 ‘DON’T LET YOUR DAY DEFINE YOU’라는 글자가 새긴 의상도 디자인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매몰되는 게 보통의 사람들이다.
“‘패션을 픽션과 구분하라'라는 언급을 통해, 예술을 소유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었다. 패션업계는 종종 사람들에 대한 신화나 반드시 사실일 수 만은 없는 표현들을 만들어 낸다. ‘당신의 직업이 당신을 규정짓게 하지 말라’를 언급한 것도, 전형이나 부분이 전체라고 생각하는 인식에 굴하지 말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유동적으로 변한다. 외모나 직업, 심지어는 유산(heritage)도 당신을 정의할 수는 없다.”
―정말 쉬지 않고 일하는 것 같다. 휴식은 어 떻게 취하는가.
“휴식은 상대적인 것이다. 일 자체가 삶이다.”
―당신 인생의 히어로를 꼽는다면
“지역 커뮤니티를 만들어 나가면서 결국에는 세계적으로 예술에 영감을 주는 ‘아이들’이 나의 영웅이다.”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계속해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 그리고 다양성과 포용성 그리고 패션업계의 진보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여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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