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DNA가 살아 숨 쉬는 듯 불멸의 미켈레 팔레트 여전히 변함없이 다채롭고 구체적이다
입력 2019.06.07 03:02 | 수정 2019.06.07 09:53

GUCCI
최보윤 기자가 본 로마의 '구찌 2020 크루즈 컬렉션'

최보윤 기자
'이 곳에 적힌 장소를 찾으시오.'

어린 시절 '보물찾기'하는 느낌이랄까. 지난 5월 28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 카피톨리니에서 열린 구찌의 '2020 크루즈 컬렉션' 초청장은 물음표 투성이였다.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르 미켈레가 이전에 몇 차례 보냈던 초청장에선 무언가 유추 가능한 '키워드'가 있었다. 피렌체 박물관이자 컬렉션명이기도 한 '구찌 가든'이나 구찌 향수이름이기도 한 '구찌 블룸'을 연상시킬 수 있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구근으로 초청장을 대신한다거나, 지난 2월엔 수공예 장인들이 일일이 손으로 빚은 '가면'을 초청장으로 대신하며 컬렉션 주제를 은연 중에 암시하기도 했다.

화려하게 꽃피우는 구근은 마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최절정의 향을 내뿜고 조금씩 사그라져가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삶을 대신 보여주는 듯 했고, '가면'에선 실제의 모습과 외적 인격이 다른 것을 응시하는 '페르소나'를 표현하고 있었다.

카시아넬리 고서점 내부.
카시아넬리 고서점 내부.
그 열쇠를 품고 있던 곳은 카시아넬리 고서점. 이탈리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중 하나인 곳으로 '수집가들의 천국'이라 불렸다. 미켈레가 영감을 받았던 장소이자, 사람들이 찾아 새로운 스토리를 발견하길 원하는 '구찌 플레이스'로 새롭게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새파란 벽과 대비되는 주홍빛 포장지에 눈길이 쏠렸다. "찾았다!" 2020 크루즈 컬렉션으로 향하는 열쇠는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든 옛날 서적이었다. "이교도적인 이 고독한 골동품은 나의 욕망을 일깨운다. 그건 지금의 세상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이자 유폐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유명 고고학자 폴 벤의 '내가 절대 지루해하지 않은 영원불멸'에 등장하는 일부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세월이 새겨져 누렇게 바랜 오래된 책들도 '보물'이었지만 그 종이에 곱게 새겨진 이 한 문장이 미켈레가 참석자들에게 전하는 보석 같은 이야기였다. 유폐된 세계에 대한 탐구, 종교적 다양성, 존재는 곧 불멸인 역사…. 뉴욕타임스가 미켈레를 가리켜 "감성적 천재(emotional genius)"라고 표현한 건 그를 가장 집약적으로 설명하는 듯하다.

카시아넬리 고서점을 지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미술관으로 꼽히는 카피톨리니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은 로마의 어디든 그렇듯, 발 닿는 곳마다 문화유산이었다. 폴 벤이 '영원불멸'이라 칭했듯, 고대의 숨결이 그대로 묻어나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거대한 유물들은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궁금하게 만든다. 느낌이란 건 혹은 영감을 받는다는 건 자신의 경험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지만, 로마 출신의 미켈레는 이 도시의 분위기 자체를 흡수하길 원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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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2020 크루즈 컬렉션의 다채로운 의상들. /구찌 제공
어디선가는 입맞추며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과, 트레비 분수나 스페인 광장 같은 영화적 명소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 외지인들, 금세 경찰들에게 발각되는 길거리 좀도둑들과 그 모든 난장과 180도 달리 장엄한 광채를 발산하는 바티칸까지. 대조적인 요소는 언제나 디자이너를 자극시킨다. 밀라노에 있는 구찌 본사(헤드쿼터)와는 조금 떨어진 이곳에 미켈레가 이끄는 구찌 디자인실이 존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쇼에 등장하는 음악은 언제나 심장 박동을 닮았다. 마치 옛 부족들이 전쟁에 나가기 북을 두드리며 전열을 정비하는 듯한 느낌이다. 전진. 크루즈 컬렉션의 막이 오르고 검은색 이교도적인 복장을 한 모델이 관객을 압도한다. 하늘로 솟을 듯한 삐죽삐죽한 깃털로 커다란 머리 장식을 한 모델은 부족장 같기도, 이교도 사제 같기도 하다.

미켈레는 공중 줄타기의 장인 같다. 아슬아슬 경계를 건드리는 듯 예민성을 보이다가도 어느새 균형을 잡고 너무나도 편안한 미소를 짓는듯하다. 관념적이다 싶으면 극도의 상업적인 스타일로 패션의 추를 돌려놓는다. 보라색, 초록색, 연노랑, 살구색, 하늘색 그의 팔레트는 여전히 변함없이 다채롭고 구체적이다. 모호함이란 그에게 지루한 단어인 것만 같다. 체크무늬와 꽃무늬, 날염과 레이스, 깃털과 로고, 인조 모피와 가죽 등 그동안 구찌를 완성했던 다양한 소재들이 또다시 새롭게 결합돼 2020 미켈레식 방정식을 이루고 있었다. 히피적인 스타일에 대한 그의 취향을 간직한 채 간결하고 우아한 재단의 의상도 눈에 띈다. 고대 이탈리아 신전이나 로마 황제 시대에 사용됐을 법한 황금색 치렁치렁한 주얼리나 머리 장식, 날개가 달린 듯한 선글라스 등 작은 디테일들이 모여 클래식과 종교 음악, 어쿠스틱과 전자 음악을 오가는 듯한 오케스트라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위쪽).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위쪽). 카피톨리니 미술관서 열린 2020 크루즈 피탈레.
숫자는 결과적인 것일 지도 모른다. 2015년 1월 미켈레가 '권좌'를 잡은 이후 치솟은 매출은 예술성은 물론 상업성도 중시되는 요즘 패션계에 가장 중요한 '덕목'일 수 있지만, 적어도 미켈레에게선 시대에 영합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소재, 스타일, 아트 등을 결집해 제시한 것이고, 이를 대중이 따라줬다. '지금의 트렌드'에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그가 트렌드를 만들어갔다는 것이다.

구찌 로고가 새겨진 화려한 드레스나, 미키마우스가 뛰어놀 것만 같은 익살스런 티셔츠, 1960년대 재클린 케네디를 다시금 연상시키는 우아한 가방, 단지 이런 것들이 그의 천재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각지의 '구찌 플레이스'를 통해 각자가 자신의 스토리를 완성해가길 원했듯, 패션은 그에게 자신에 대해, 그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울긋불긋 꽃과 식물이 가득한 그의 패턴에선 도시계획과 교수인 오래된 연인에 대한 애틋하면서도 편안한 감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자연에 너무 다가간 나머지, 호랑이나 뱀, 벌 같은 동물과 곤충을 넘나드는 그의 자수나 장식에서 느껴지는 과감성은 쉽게 도전하기 어려워 보일 수도 있다. 신기한 건, 포효하며 바로 튀어나갈 듯한 동물들이 그의 다른 의상들과 함께 입으면 구름 위를 사뿐사뿐 걷는 듯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포용성. 미켈레 스타일에서 가장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이 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다.

미켈레의 스타일에 빠져 옷장을 모두 미켈레의 옷으로 채워버릴 정도로 열성팬이 돼 버린 전설적인 영국 가수 엘튼 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켈레는 '사이즈'라는 잣대가 필요없는 농구나 미식축구 스타를 위한 옷도 만든다. 대부분 디자이너가 거식증으로 말라비틀어진 옷 쪼가리를 만드는 동안 그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옷을 만든다"고 밝히기도 했다. 과감한 패턴이나 색감에 가려 덜 주목받았던 그의 다양성, 그러니까 일반인 모델, 트렌스젠더 등 피부색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또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했던 그의 포용이 이제 가시화되는 듯하다. 가끔은 그의 뜻과 달리 오해받는 일도 있지만, 그런 걸 가리켜 '유명세'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가.

컬렉션 디테일 컷.
컬렉션 디테일 컷.
엘튼 존은 또 같은 인터뷰에서 미켈레의 겸손한 성격에 대해서도 치켜 올려세웠다. "패션이란 건 신들이 마치 '디바'나 되는 듯 혹은 '위대한 전설'이나 되는 듯 (으스대는) 이들로 존재한다지만, 많은 디자이너를 떠올려볼 때, 단언컨대 단 5분도 같이 있기 싫은 인간들로 가득하다. 아마 당신들도 대부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미켈레는, 정말 정말 겸손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 터져 나온다. 디자이너 하면 예민하고 까칠하고 까다로운 성격으로 똘똘 뭉쳐 있을 것 같건만 직원 식당에서 스스럼 없이 어울려 먹거나, 쇼가 끝난 뒤 막내 직원들까지 안아주고 어깨를 다독여주며 그가 받아야 할 감사를 남들에게 돌린다고 했다.

구찌는 이번 크루즈 컬렉션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2년간 캄피돌리오의 남쪽에 있는 암벽인 타르페아 절벽(Rupe Tarpea)의 복원 프로젝트 지원을 위한 기부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세기까지 반역자들을 절벽 아래 위치한 포로 로마노로 떨어트려 사형시킨 곳으로, 이는 로마에서 추방됐음을 상징했다. 사악한 범죄자들도 있었지만 시대정신을 거슬렀기 때문에 처형된 이도 있었다. 다공성 암석인 튜퍼로 이루어진 이 절벽은 수세기에 걸쳐 깎이고 파이면서 현재의 독특한 자연 공간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적어도 미켈레는, 물론 복원한다는 걸 지원한다지만, 그 절벽이 다 깎인다 해도, 패션계에 남긴 그의 찬란한 유산은 영원불멸하게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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