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샤넬, 구찌 보이 해외에서 먼저 찾아요"
입력 2019.04.12 03:02 | 수정 2019.04.12 10:11

[최보윤 기자의 럭셔리 토크]

[최보윤 기자의 럭셔리 토크]
최근 서울에서 열린 샤넬-퍼렐 캡슐 컬렉션 행사장에 등장한 블랙핑크 제니. / 스포츠조선
"한국 패션계와 소비자들의 소비 트렌드에 대해 듣고 싶어요. 시간 내 줄 수 있나요?"

얼마 전 이메일을 열어보다 '렌트 더 런웨이'라는 글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렌트, 더, 런웨이, 라니!!!! 패션계에서뿐만 아니라 미 스타트업계에 혁신을 이끈 의류 유통계의 넷플릭스로 꼽히는 바로 그 회사 아닌가! 2009년 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동창생이 만든 이 회사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온라인 거래 시장으로 미국 유통 구조의 변화 이끈 주역이다. '런웨이를 빌린다'는 글자 그대로 매월 혹은 한 번에 일정 금액을 내고 고급 패션부터 일상 의류까지 빌려 입는 시스템을 만든 회사다. 2016년 기준 연간 매출 1억 달러(약 1130억원)를 돌파했고, 기업가치 역시 1조가 넘는 대표적인 '유니콘'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회사 관계자들이 한국을 직접 찾는다니, 그것도 직접 만나고 싶다고 연락까지 해오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명목상 한국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오는 것이라 포장하고 있었지만, 한국의 패션 트렌드와 선호하는 브랜드 등 분명 시장 조사를 하러 온 듯 보였다. "인터뷰는 아니다"라는 걸 전제하고 새벽부터 움직인다는 그들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졸음을 쫓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최보윤 기자의 럭셔리 토크]
구찌 주미 런칭 행사장에서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자랑한 카이. / 구찌
"한국은 근 10년간 가장 빠르게 패션 트렌드가 변하고, 세계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나라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국 소비자들 취향은 어떤지 알고 싶은 것이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리에 앉은 '렌트 더 런웨이' 관계자들이 입을 모았다. 친구들끼리 수다 떨듯 편하게 가벼운 정보만 나누자고 했건만, 이미 한국 여성들의 패션 스타일, 미용법 등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것 같은 그들 앞에서 무엇을 더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K 팝과 K뷰티 트렌드 덕에 상당히 익숙한 듯 보였다.

해외 패션 관련 출장을 다니다 보면 절로 으쓱으쓱 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에 정식 초청받아 해외 VIP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류 스타들 덕분이다. 지난해 가을 파리에서 열린 구찌쇼에선 우리말로 엑소 카이의 이름과 그의 본명인 김종인을 외치는 수백명의 현지 팬들 덕분에 동네가 마비될 정도였다. 유명 할리우드 스타 자레드 레토에게 향하는 함성과는 데시벨 수준 자체가 달랐다. 자신이 아끼는 아티스트에 대한 충성도는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호감도로 이어졌다. 전 세계 팬들을 들썩이는 카이의 위력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이제 구찌 본사에서 셀러브리티나 VIG(Very Important Gucci custome)를 초청할 때 이를 통칭하는 용어가 카이로 통일됐을 정도다.

불가리 역시 얼마 전 로마에서 열린 비제로원 행사를 치르면서 엑소 수호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로마에 퍼지는 김준면(수호 본명)과 수호를 외치는 현지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에 본사에서 먼저 놀랐다는 후문이다. 불가리는 이미 할리우드 스타들이 먼저 찾는 브랜드였기에 어쩌면 '변방' 일수 있는 한국 스타에 대해 무심할 뻔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부로 느끼는 홍보 효과는 그야말로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해외 패션 관계자들을 만날 때면 "혹시 BTS는 오지 않는가"라는 이야기를 듣곤 하니 아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듯싶다. '인간 샤넬'로 불리는 블랙핑크의 제니 역시 샤넬에 젊음을 불어넣고, 팬을 몰고 다니는 주역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이 트렌드에 민감하다는 게 빠르게 알려지면서 해외 패션계에선 일부러 한국 '원정 쇼핑'을 오기도 한다. 얼마 전 모 럭셔리 브랜드 본사 담당자들이 양손 무겁게 돌아간 아이템 중 하나는 바로 삭센다 주사.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에서 내놓은 비만 치료 주사제로 '강남 다이어트'라는 애칭이 붙었다. 미 FDA 승인이 났지만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 등도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서 뜬다"는 그 위력적인 한 마디가 유럽에서 온 이들의 지갑을 열었다. 유럽산 주사를 유럽인들이 한국에서 사가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된 것이다.

최근 일부 K팝 스타 연예인들의 일탈과 범죄가 하루가 멀다고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해외에서 더욱 민감한 성 감수성 문제가 글로벌 매체에도 등장해 이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이미지는 모래성 같아 쌓기도 어렵고, 무너지는 건 일순간이다. 해외 팬들이 '한국'이라는 소리에 먼저 악수를 청하며 인사하고 서로 알고 싶어하던, 그 장면이 그저 과거의 명장면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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