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자 파트너이자, 그 운명의 짝… 천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입력 2018.11.08 15:45

[최보윤 기자의 럭셔리 토크]

최보윤 편집국 문화부 차장
최보윤 편집국 문화부 차장
"돌이켜보건대, 누구를 만나느냐가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 말이죠."

얼마 전 파리에서 만난 디자이너 안드레아스 크론탤러는 그의 아내이자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77)를 꼭 안아주면서 말을 이었다. 영국 펑크 패션을 주도한 그 비비안 웨스트우드다. '2019 봄여름 비비안 웨스트우드쇼' 백스테이지에 모습을 드러낸 둘은 11살의 나이차(크론탤러가 연하다)가 무색하게 연인이자 동료의 든든하면서도 애틋한 장면을 계속 연출했다. "비비안을 만난 건 획기적인 일이었어요. 스승과 제자로 처음 대면했지만 지금까지도 일방적으로 배울 리는 없잖아요. 하하. 함께 격렬한 논의를 할 때도 있고, 서로 배워간답니다. 중요한 건, 제가 비비안을 극적으로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이죠. 그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결혼 25년차 크론탤러는 그와 몇 미터 떨어져 방송 카메라 앞에선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안드레아스 크론텔러가 파리에서 선보인 ‘2019 봄 여름 비비안 웨스트우드’ 주요 의상.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생각을 의상으로 표현했다.
안드레아스 크론텔러가 파리에서 선보인 ‘2019 봄 여름 비비안 웨스트우드’ 주요 의상.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생각을 의상으로 표현했다. /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공
둘은 지난 1988년 처음 만났다. 영국 유명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의상을 디자인하며 이미 성공한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였던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오스트리아 비엔나 아트 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크론탤러는 "굉장히 뛰어난" 학생이었고, 둘은 이내 사랑에 빠져 1993년 결혼한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크론탤러가 비비안 웨스트우드에게 유일하게 반항(?)했던 학생이었다고 한다. 비비안의 스타일을 지적하고 심지어 '마음에 안 든다'고도 했단다. 디자이너로서의 대단한 자존심이 보이는 순간이다. 한때 드라마 패러디처럼 유행했던 "나에게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의 실사판인 셈이다.

영국 여왕 훈장도 받은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자신의 여러 라인 중 하나인 '안드레아스 크론탤러 포 비비안 웨스트우드' 컬렉션을 그에게 맡겼고, 파리에서 성대하게 선보이고 있다. 이번 시즌 선보인 작품은 사진작가 제시카 풀 포드 돕슨의 '카불의 스케이트보드 소녀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암울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아이들이 독일 비영리단체인 '스케이트이스탄'의 도움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배우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미래를 봤다는 것이다. 실제 스케이트 보더들이 등장해 모델들과 함께 런웨이를 장식했다. 인종과 성별을 허문 모델들 역시 다수 등장했다.

해외 매체에서 호평받은 '2019 봄 여름 마크 제이콥스' 패션쇼의 의상.
해외 매체에서 호평받은 '2019 봄 여름 마크 제이콥스' 패션쇼의 의상. /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
패션계에는 스승이자 파트너이자 든든한 후원자들이 종종 존재한다. 천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천재를 알아봐 주고 지지해주는 이들이 없었다면 어떤 예술작품 못지않은 의상들과 디자이너는 세상에 빛 한번 내지 못했을 수 있다.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과 그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파트너였던 사업가 피에르 베르제, 마크 제이콥스와 로버트 더피, 미우치아 프라다와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에겐 예술적 감각을 마음껏 펼칠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인생 파트너가 있었다. 캘빈 클라인의 CEO였던 배리 슈워츠도 어린 시절 오랜 친구였던 인연으로 창업 당시 1만불을 빌려줘 캘빈 클라인이 '전설'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줬다.

요즘 국내 디자이너들을 보면 가끔은 애달프다. 회계부터 각종 마케팅까지 디자이너들이 모든 걸 도맡아 해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대기업이 인수라도 하면 어느새 디자이너의 색채는 지워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베인앤컴퍼니 출신 제임스 앨런 등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기고했듯 창의력 풍부한 우뇌형 디자이너와 냉철한 기업가형 좌뇌형 리더가 만난 양뇌형 조직으로 혁신해야 하는 건 해외에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중국은 3년 전 중국기업가 등의 대대적인 후원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중국디자이너전시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82만명 가까운 인원을 모으며 역대 6위의 관람객을 기록했다. 우리에겐 언제쯤이나 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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