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무대 위 하늘거리는 투피스에 그녀의 순수함을 그렸다
입력 2018.10.12 03:00

발렌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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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 발렌티노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선보인 2019 봄여름 컬렉션 의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에파올로 피치올리의 디자인은 쿠튀르 감각을 최상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발렌티노를 다시 최전성기로 끌어올릴 것이란 호평을 받았다. 최근 도쿄에서 열린 베르디오페라 ‘라트라비아타’에서도 발렌티노의 디자인 감각은 오페라의 품격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다./발렌티노 제공
"지난날의 즐거운 꿈이여, 안녕."

덧없는 죽음 위로 드레스 자락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반투명한 재질로 속이 비칠 듯 말 듯 디자인한 숄이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도토의 어깨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땐 사교계의 '꽃'이었지만 결국은 매춘 여성이란 굴레에 갇힌 채 폐결핵으로 죽어간 비올레타. 그 애달픈 사랑이 지난달 중순 일본 도쿄 우에노의 도쿄문화회관을 적셨다. 이탈리아 고급 패션 브랜드인 발렌티노(Valentino)가 주인공 비올레타와 그의 친구 플로라, 여성 합창단의 의상을 도맡아 화제를 모은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였다. 2016년 5월 이탈리아 로마의 로마국립오페라하우스에서 첫 공개한 이후 도쿄로 장소만 옮겨 1년4개월 만에 다시 선보였다. 미국 영화감독 소피아 코폴라가 연출을 맡아 더욱 관심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발렌티노는 꽃을 모티브로 삼거나 강렬한 붉은색을 과감하게 사용해 여성성을 극대화한 의상을 만들어왔다. 이탈리아 특유의 실용적 디자인과 프랑스의 감각적 장식주의를 적절히 결합한 브랜드로 평가받는다. 특히 여성스럽고 고상하면서도 세련된 패션을 지향해 오드리 헵번과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소피아 로렌, 엘리자베스 헐리, 줄리아 로버츠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유명인사들이 공식행사 때마다 즐겨 입었다. 특히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서도 발렌티노 옷을 입고,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할 때도 발렌티노의 웨딩드레스를 입을 만큼 열렬한 팬이었다.

그런 발렌티노가 종합예술의 총체인 오페라의 의상에 손을 댄 건 브랜드의 시초와 관련이 깊다. 섬세한 아름다움과 최상의 장인(匠人) 정신을 패션으로 구현하기 위해 1962년 로마에서 탄생한 발렌티노는 태생 자체가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고급 맞춤복)에서 시작됐다. 2008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된 피엘파올로 피치올리가 아름다운 옷을 디자인해내면 팔라초 미냐넬리에 자리한 아틀리에에서 60명의 재봉 전문가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의상을 만들어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는 식이다.

한정된 시간, 꽉 막힌 무대 위에서 오페라 속 인물들의 성격과 운명을 의상으로 단박에 보여준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발렌티노는 해냈다. 1막에서 비올레타의 칠흑같이 어두운 치마는 끝자락에 공작새 꼬리처럼 긴 초록 장식을 달아 아름답지만 뭇 남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웃음을 팔아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상징했다. 알프레도와 사랑에 빠져 시골로 도피한 이후엔 가녀린 숨에도 우아하게 하늘거리는 투피스를 입어 순수한 마음을 그려냈다.

옷감의 재질과 색상, 무늬만으로도 수만 가지 사연을 전하는 오페라 의상은 최근 발렌티노가 내놓은 2019년 봄·여름 컬렉션과도 일맥상통한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의상에 실어 보낸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장식은 최대한 걷어내고, 까맣거나 붉거나 흰 단색으로만 드레스를 펼쳐내 발렌티노 특유의 화려하고 기품 넘치는 매력, 여성스럽고 몽환적인 색채를 강화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 그러면서 가장 진실한 것을 드러내겠다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진심이 담겼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풍성하게 부풀린 소맷단과 치마. 허리는 몸에 꼭 붙여 날씬한 선을 강조하면서도 나머지 부분은 넉넉하게 흘러내리다가 끝 부분만 느슨하게 살짝 묶어 볼륨을 살렸다. 노출이 거의 없는데도 몸의 실루엣은 그대로 드러나게 재단한 솜씨가 은근한 관능미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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