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거리, 그곳이 바로 "Show Room"
입력 2018.09.21 03:00 | 수정 2018.10.15 15:08

[최보윤 기자의 럭셔리 토크]

최근 뉴욕에서 열린 롱샴 파리 2019봄 컬렉션 무대에 선 모델 카이아 거버. 모델 신디 크로퍼드의 딸로 최근 런웨이에 가장 많이 서는 모델 중 하나다.
최근 뉴욕에서 열린 롱샴 파리 2019봄 컬렉션 무대에 선 모델 카이아 거버. 모델 신디 크로퍼드의 딸로 최근 런웨이에 가장 많이 서는 모델 중 하나다. / AP연합뉴스
뉴욕의 계절 변화는 거리를 물들이는 사람들이 의상으로 알아챈다. 철 따라 의상이 바뀌는 거야 너무나 당연하고, 바쁜 일상에 쫓겨 바로 앞에 있는 이들조차도 뭘 입었는지 바라볼 새 없다는 게 뉴요커의 하루라지만, 봄·가을만큼은 일부러 눈감지 않는 한 알아채지 못할 수 없다. 2월과 9월 열리는 패션 위크 때문이다. 걸어 다니는 조각 같은 수퍼 모델들이 지하철을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쇼장을 향하고,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눈에 띄는 의상을 휘감은 이들도 전 세계 어디선가 튀어나와 파파라치 카메라의 플래시를 즐긴다. 총천연색의 독특한 재단의 의상, 건축적인 하이힐, 화려한 메이크업 등은 카메라의 관심을 끌기 충분하다. 최근 들어선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인스타그래머나 인플루언서까지 모여들면서 말 그대로 거리는 어느새 레드카펫 현장이자 영화 촬영장 같은 분주한 모습이다.

뉴욕을 시작으로 밀라노, 런던, 파리 등 4대 패션쇼가 열리는 도시의 풍경은 대체로 비슷하다. 프론트 로(frot row)에 앉는 스타들이 팬들의 시선을 즐기고, 런웨이를 방금 마치고 나온 모델들도 기꺼이 피사체가 돼 준다. 다음 시즌 봄·여름 의상의 화사한 기운을 미리 느낄 수 있는 9월의 분위기는 더욱 싱그럽다. 뉴욕을 패션계 '핫'한 동네로 만들어버린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셉템버 이슈'를 기억해보자. 잡지 '9월호'를 말하는 셉템버 이슈는 다음 시즌, 다음 한 해의 트렌드를 내다보고 심지어 그다음 경제까지 예측할 수 있는 힘있는 패션계 바이블이나 다름없다. 보그지 기준으로 한 해 가장 많이 팔리는 달이기도 하다. 화려함은 팬들을 이끈다. 약 열흘간의 패션 축제에 기자, 바이어, 모델, 관광객까지 맨해튼 각지에서 벌어지는 쇼를 즐기기 위해 뜨거운 멜팅 팟을 더 뜨겁게 만든다. 지난해 기준 평균 15만여명의 방문객이 쏟아진다고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이들이 이 기간 먹고 자고 쇼핑하며 쓰는 돈만 약 5억9800만달러(약6700억원)이다. 2014년 기준으로 뉴욕 패션 위크가 연간 벌어들인 금액은 약 8억8700만달러(약 9940억원). US오픈으로 뉴욕시에 창출된 경제효과 7억달러(약 7850억원)와 뉴저지에서 열렸던 슈퍼볼의 경제효과 5억달러(약 5600억원)를 뛰어넘는 수치라고 패션 전문지 WWD는 분석한 바 있다. 브랜드에서 쇼 하나를 치르는 데만 약 20만달러를 지출한다. 길어야 30분 정도 선보이는 쇼를 위해 장소 임차료만 1만5000달러에서 6만달러에 달한다.

그랬던 뉴욕 패션 위크가 최근 위축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적지 않았다. 뉴욕의 신성 톰 브라운과 프로엔자 스쿨러, 로다르테, 알투자라 등이 지난해 파리로 쇼 장을 옮기고, 오프닝 세리모니와 후드바이에어도 뉴욕의 품을 떠났다. '지금 보면서, 바로 산다'(See Now Buy Now)가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거창한 쇼보다는 지금 당장 사서 입을 수 있게 하거나, 여러 브랜드들이 인스타그램을 위한 쇼를 기획하는 등 축소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에클하우스 라타 같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스타들의 빈자리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미지 크게보기
1 최근 열린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에 참석한 배우 로지 헌팅턴. 2 배우 겸 모델 야노 시호. 3 2019 봄여름 마이클 코어스 패션쇼에 참석한 배우 니콜 키드맨. 4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에 참석한 배우 블레이크 라이블리, 폴 페이그, 헨리 골딩. / 랄프로렌·마이클 코어스·AP연합뉴스 제공
이미지 크게보기
5 런던에서 열린 2019 봄여름 패션쇼를 마치고 나온 디자이너 빅토리아 베컴. 6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에 초청된 배우 김혜수. 7 마이클 코어스 2019 봄여름 뉴욕 패션 위크에 초청된 블랙 핑크 리사. 8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뉴욕 패션쇼에 등장한 배우 제시카 채스테인. / 랄프로렌·마이클 코어스·AP연합뉴스 제공
하지만 이번 시즌 뉴욕은 다시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 로다르테와 프로엔자 스쿨러도 뉴욕을 다시 찾았고,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바이어를 위한 쇼를 뉴욕에서 열었다. 프랑스 브랜드 롱샴은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기념해 뉴욕 패션 위크 문을 두드렸다. 현지에서 인기 많은 후드바이에어의 셰인 올리버와도 협업했다. 팝 가수 리한나가 지난 5월 첫선을 보인 란제리 브랜드 '새비지 x 펜티'가 뉴욕 패션 위크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쇼를 브루클린에서 열면서 젊은 층을 들썩이게 했다. 하지만 뉴욕에 '진짜' 젊음을 가져다준 건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기념한 랄프로렌쇼에서였다. 거장의 반세기를 기념하기 위해 스타 중의 스타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힐러리 클린턴, 오프라 윈프리, 스티븐 스필버그, 로버트 드니로 같은 거장에서부터 배우 블레이크 라이블리, 앤 해서웨이, 제시카 채스테인, 카밀라 벨, 프리양카 초프라와 닉 조나스 커플, 가수 카녜 웨스트 등 레드카펫을 방불케 하는 자리였다. CNN의 유명 앵커 앤더슨 쿠퍼는 물론, 마이클 코어스, 캐롤라이나 헤레라,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타미힐피거, 톰 브라운, 토리버치 등 뉴욕의 얼굴 같은 디자이너들도 거장의 디자인 인생을 기념하러 모였다. 우리나라의 김혜수도 랄프로렌의 공식 초청을 밟아 50주년 기념 무대에 세계적인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신성들이 주목받는 런던에선 12년간 지휘했던 지방시를 떠나 버버리에 새롭게 둥지를 튼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가 도시 전체를 들썩였다. 버버리 창립자 토마스 버버리의 이니셜을 딴 로고를 새롭게 발표해 이미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런던에서 졸업전시회를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전통과 미래가 교감하는 수준 높은 컬렉션을 선보였다. 지방시에서 보여줬던 세련된 재단과 고급스러운 옷감의 선택은 영국 전통의 새빌로 테일러링을 연상시키며 버버리에서 한층 격조 높게 완성됐다. 영국의 빅토리아 베컴은 데뷔 장소인 뉴욕을 떠나 브랜드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특기인 남성적인 정장에서 영감 받은 의상을 선보였다. 발등 윗부분을 길게 자른 슬릿(slit) 디자인의 팬츠 역시 눈길을 끌었다.

패션은 판타지다. 디자이너 톰 포드가 말하지 않았나. 충격을 주지 못한다면 패션이 아니라 단순히 옷일 뿐이라고. 패션쇼는 의상을 그저 보여주는(show) 발걸음이 아니다. 삶의 태도다. 음악과 연결되며 미식을 탄생시키고 인테리어를 변화시키며 건축에도 영감을 준다. 디자이너 랄프 로렌은 말한다. "나는 옷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다. 꿈을 디자인한다."
맨 위로